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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코뿔소

입력 2024.01.24 20:16

수정 2024.01.2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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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위험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지만 오랫동안 방치하여 위험에 대응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을 ‘회색 코뿔소’라고 한다. 2013년 미셸 부커가 다보스포럼에서 처음 말한 개념이다. 한국에도 몇 마리의 회색 코뿔소가 배회한다. 그중 하나가 사회의 양극화이다.

회색 코뿔소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존재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그 나라 지배층 구성의 핵심적 원리에 내재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이래 우리나라는 지역적 양극화 경향을 내포하는 중앙집권제를 유지해왔다. 양극화를 초래하는 직접적 요인은 과거와 다르나, 그 결과는 비슷한 데가 많다.

조선시대에 지배층 지위를 유지하고, 또 지배층 내에서도 더 유력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필수 관문은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것이었다. 과거시험은 크게 두 종류였다. 3년마다 정기적으로 치르는 식년시와 부정기적으로 실시되는 특별시험인 별시가 그것이다. 별시는 한 번에 뽑는 인원이 정해져 있지 않았지만 식년시보다는 그 수가 적었다. 상식적으로는 식년시의 실시 횟수나 선발 인원이 별시보다 많아야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실시 횟수로도 별시가 식년시보다 3배 이상 많았고, 선발 인원 역시 별시 합격자 총수가 식년시 합격자 총수보다 더 많았다.

조선 전기인 15, 16세기엔 별시가 자주 실시되지 않았다. 식년시가 과거시험의 중심이었고, 별시는 나라에 특별히 경축할 일이 있을 때나 가끔 있었다. 별시가 많아지기 시작한 때는 16세기 후반부터이다. 17세기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확대되었다. 왜 그 시기부터 별시가 많아졌을까?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선조가 즉위(1567)하면서 사림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후 재지 사족의 중앙 정계 진출 욕구가 더욱 증가했고, 그 욕구를 수용하기 위해 여러 새로운 명분을 만들어 별시를 활발히 실시했던 것이 별시 급제자가 증가했던 원인이다(차미희, <조선시대 문과제도연구>, 국학자료원, 1999). 재지 사족이란 지방에 사는 양반 가문의 사람들이다.

조선시대 양반의 공적인 사회활동은 관료가 되는 길밖에 없었다. 양반들의 공적인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공간이 한양뿐이었다는 말이다. 물론 지방에 사는 양반도 있었고, 지방에 근무하는 관리들도 있었지만 지배층의 공적인 삶의 주요 영역이 한양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정도는 아니다. 흥미롭게도 별시가 확대되기 시작하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지방 국립학교인 향교의 교육 기능이 부실해졌다. 이를 대신해서 지역의 유력한 양반들이 사립학교인 서원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교육의 공적 기능이 약화되었다.

대한민국과 조선 왕조를 동일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중앙’으로 몰리는 힘이 작동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2019년에 실시된 조사에 따르면 인터넷 취업 준비 카페에 게시된 스터디 모임 모집 공고의 비중은 서울이 67%, 인천과 경기도가 19.7%였다고 한다. 수도권 비중이 86.7%에 달한다. 같은 시기에 삼성물산, SK그룹, 한국도로공사, 한국조폐공사, 한국가스안전공사 등 민간 대기업과 공기업을 포함한 626개 회사의 인턴 모집 공고를 분석하면, 서울이 60.8%, 인천 및 경기가 15.7%로 수도권 비중이 76.5%에 달했다(조귀동, <세습중산층사회>, 생각의힘, 2020). 취업을 하기 위해서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다니든지, 아니면 지방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에 서울로 오는 것이 크게 유리하다는 뜻이다. 지방에서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 다수가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양극화는 공동체의 약화와 균열이라는 결과를 불러온다. 조선은 결국 한양에 집중된 힘있는 가문들의 카르텔인 세도정권이 성립되면서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조선왕조의 경제는 농업이 기반이었기 때문에 양극화가 지방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지는 않았다. 대한민국은 그조차 아니다. ‘지방소멸’이라는 말이 나온 지도 이미 시간이 꽤 흘렀다.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이정철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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