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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한 장면

아버지 기일을 앞두고 고향에 갔다. 책상 서랍을 열었더니 낡은 노트가 한 권 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쓴 노트일까?’ 생각하며 노트를 펼쳤다. 노트 상태는 오래됐지만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람의 손때가 거의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빛바랜 노트 첫 장에 검은색 사인펜으로 ‘한창’이라고 두 글자가 적힌 게 다였다. 분명 내 글씨였다. 정확히는 20대 시절의 글씨였다.

20대 후반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오른쪽 팔꿈치 관절을 크게 다치면서 손목 관절 또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글씨체가 달라졌다. 그러니 그 글씨는 사고 이전에 쓰인 것일 테다. 글자가 쓰인 시기를 특정했다고 해서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다. 한창이라니, 저 단어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당시에는 분명 새 노트였을 텐데, 왜 저 단어만 덩그러니 적힌 것일까.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생각만 깊어졌다. 맥없이 노트를 덮는데 머릿속에서 하나의 장면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대학교 방학을 맞이해서 오랜만에 고향에 갔을 때였다. 매일 고등학교 동창들과 밤늦게까지 놀았다. 아무개 생일이라고, 다른 아무개가 입사했다고, 또 다른 아무개가 실연으로 우울해해서 어디 좀 다녀오기로 했다고. 집에 붙어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부모님과 식사 한 끼 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의 불찰이었다. 즐거움과 한가로움에 취해서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 날, 탕아처럼 귀가한 내게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한창나이 때 몸 관리를 해야 해. 한창이라서 무분별해지기 십상이지만 한창이니까 더 조심해야 해. 더 살펴야 해.” 당시의 내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을 리 없다. 단지 한창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아 노트에 적어두었을 것이다.

한창은 아름답고 위험한 것이었다. 한창이어서 바쁘고, 한창이니까 열정을 기울였다. 한창에만 기댔다가 일을 그르치기도 했다. 활기만 믿고 과로하거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인심을 잃기도 했다. 아버지는 아마 한창의 신기루에 대해 말씀하시고 싶었을 것이다. 빛바랜 노트를 버리지 않아서, 한창이라는 두 글자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나는 그 장면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다. 한창에 대해 과신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과는 별개로, 두 글자가 열어젖힌 기억의 생생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부터 강박적으로 메모하기 시작한 것도 기억 때문이 아니었을까. 남아 있어야 다시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 남은 것으로부터 잃은 것을 헤아릴 수 있으니까. 다 쓴 수첩과 못다 채운 노트를 선뜻 버리지 못하는 이유도 아직 붙들게 남아서가 아닐까. 기억은 기록으로 정확해진다. 기록은 기억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그때’를 ‘지금’으로 소환하는 데 기록만큼 영향을 미치는 요소도 없다. 기록은 무엇을 쓸지, 어떻게 말할지, 언제 어디로 갈지, 왜 사는지, 내가 누구인지 등의 질문부터 그때와 지금 무엇이 같고 다른지 내력까지 일러준다.

기록을 들추면 육하원칙이 가득하다. 내가 여기까지 온 궤적이 선명해진다. 고작 단어 하나, 사진 한 장뿐인데도 실타래가 풀리듯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이다. 견문록처럼 후대에 남길 목적으로 작성되는 공적 기록도 있지만, 나를 깨우치고 변화시켰던 순간들이 모인 사적 기록도 있다. 기록함으로써 감정은 분명해지고 생각은 단단해진다. 기억의 왜곡과 축소를 막아주는 것도 기록이다. 어릴 적 쓴 일기가 일상의 패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성인이 되어 남기는 기록은 기억할 만한 내 인생의 장면들을 늘려주는 일이다.

몇년 전부터 ‘오늘 한 장면’이란 제목으로 사진 일기를 쓰고 있다. 오늘 찍은 사진 한 장과 거기에 걸맞은 단어 하나를 적는다. 들여다보면 그때 그 순간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기록하는 사람이 늘 한창때를 사는 이유다. 자신을 잘 알려고 하는 사람에게 똑같은 날은 없다.

오은 시인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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