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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범인일 때

입력 2024.01.30 20:14

그때 아이는 10개월밖에 살지 못했다. 가슴이 미어지고 또 미어졌다.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었다. 2011년의 비극이 이미 일어난 뒤에야 부모는 알았다. 아이를 더 잘 돌보려는 마음에서 틀어준 가습기가 비극의 씨앗이었다. 아이의 폐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혔다. 더 위생적인 가습기를 만들어 준다고 신문 방송에서 홍보하고 광고하던 살균제에 유독물질이 들어 있을 줄이야! 가습기살균제에는 ‘인체에 해가 없다’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독사의 굴인 줄 알고서, 제 아이의 손을 잡아 넣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폐질환 전문의인 서울아산병원 홍수종 교수도 자신도 2011년 봄까지는 가습기살균제가 급성간질성 폐질환의 원인일 것이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고 논문에 썼다.

지금 상식으로 보면,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어린아이, 노부모, 환자의 폐에 살균제 성분을 집어넣는 상품이 개발되고, 큰 돈벌이가 되었을까?

비극의 문을 연 것은 국가였다. 그 사건은 오로지 대한민국에서만 일어났다. 유독화학물질을 ‘유독화학물질에 해당하지 않음’이라고 승인하고 관보에 게시한 법적 주체는 국가였다. 옥시나 SK가 아니었다. 국가는 공식 사망자 1258명의 비극을 겪은 뒤에야, ‘유독물질에 해당함’이라고 심사 결과를 바꾸어 관보에 올렸다.

만일 처음부터 국가가 제대로 유해화학물질심사를 진행하여 문제의 ‘PHMG’ ‘PGH’ 성분에 대하여 유독물질로 판정하였다면 이 성분들은 한국 사회에 아예 진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습기살균제라는 상품은 한국 사회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돈에 눈이 먼 자들은 사업자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법적으로 정해진 심사 신청서의 ‘주요 용도’를 ‘주요 농도’로 교묘히 글자를 바꿔 서류를 만들었다 해도, 국가만큼은 제 구실을 해야만 했다. 두 눈 부릅뜨고 사업자들을 꾸짖어야 했다. 화학물질을 어디에 사용하려고 심사를 신청하는지 분명히 물어야 했다. 그것이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시민이 세금 내어 공무원을 먹여 살리는 까닭이다.

그러나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기꺼이 공범이 되어 주었다. ‘유독물질에 해당하지 않음’이라는 거짓 권위를 부여해 주었다. 한국 사회를 맘껏 활보하게 허용했다.

급기야 ‘인체에 해가 없음’이라는 치명적 사기조차 국가는 방임했다. 아니 승인했다. 국가 인증 ‘KC’마크까지 붙여 주었다. 돈에 눈이 먼 사업자들은 ‘유럽에서 온 신개념 가습기살균제’ ‘EU 승인 안심물질 사용’이라는 거짓 광고문구를 귀여운 아기 사진과 함께 실어 젊은 부부들에게 마구 팔았다.

대한민국의 공무원들 중 단 한 명도 사업자들에게 인체 무해 ‘실증 책임’을 단 한 차례 묻지 않았다. 표시광고법 제5조가 준 권한을 사용한 공정거래위원회 공무원은 아무도 없었다. 정권은 바뀌어도 공정거래위원회 공무원들은 바뀌지 않았다. 심지어 공정거래위원회 공무원들은 아이들이 죽고 난 뒤에도, 인체 무해 허위 표시 사건 조사를 거부했다.

그러므로 나는 외친다. 국가가 공범이다. 이제 하나하나 진실의 빛이 드러나고 있다. 뒤늦게서야 너무도 늦게서야 헌법재판소는 2022년 공정거래위원회의 잘못을 인정했다. SK케미칼과 애경산업 가습기살균제의 허위 광고 사건을 심사하지 않는 것이 피해자의 기본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판정했다. 그리고 이어 지난달, 서울고등법원은 ‘가습기 메이트’ 상품을 판매한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의 전직 임원에게 유죄를 선고하였다.

나는 기다린다. 아이 부모의 끈질긴 노력으로 이제 국가는 법의 심판대에 올라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마침내 다음달 6일 국가에 배상 책임을 묻는 항소심에서 판결을 선고한다. 국가 책임에 관한 첫 항소심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아이의 부모는 2014년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사이 ‘세퓨’ 가습기살균제 제품을 판 회사 대표는 옥살이를 살고 사회에 나왔다.

사법부가 아이 부모의 눈물을 닦아 주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피해자가 당당하게 국가에 법적 배상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습기살균제 참사 13년이 넘도록 아직 해결하지 않은 과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피해자에게 모든 것을 입증하도록 떠넘겨서는 안 된다. 가해자인 기업이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도록 대전환을 이루어내야 한다. 시급하게 바꾸어야 한다. 이 제도적 전환은 1만명이 넘는 ‘동료시민’을 억울하게 떠나보낸, 남은 자들의 몫이다. 10개월을 같이 산 아이를 하늘로 보내야만 했던 부모에게 우리가 해줄 최소한의 위로이다.

송기호 변호사

송기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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