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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밀양, 그리고 잔소리와 밥

지난 주말 친구들과 함께 밀양에 갔다. 정확하게는 한때 ‘밀양의 전쟁’이라고 불렸던 탈송전탑 투쟁의 주역, ‘밀양 할매’들을 만나러 갔다. 더불어 2012년 이후 꾸준히 사람과 감과 책이 오가면서 정분을 쌓아온 단장면의 박은숙, 권귀영 등도 보고 싶었다. 여전히 밀양에는 한전의 보상금 수령을 거부하며 버티는 100여가구의 사람들이 남아 있지만, 할매들은 대부분 쇠잔해져 잘 모이지 못한다고 했다. 이번에 우리가 뵐 수 있던 할매도 덕촌 할매(89세), 동래 할매(82세) 두 분이었다.

140㎝, 34㎏의 바싹 마른 삭정이 같은 몸으로 산꼭대기 움막 농성장에서 꼬박 7개월을 살기도 했던 덕촌 할매는 이제 더 작아진 몸으로 딸네 바로 옆의 작은 농막에서 지내고 계셨다. 우리를 잘 알아보지 못했지만 “멀리서 온 연대자”에 대한 반가움은 감추지 않으셨다. 동래 할매는 우리를 많이 기다리신 눈치였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손수 농사를 지었다는 땅콩과 생강꽃차 그리고 과일을 계속 내오셨다. 그런데 위암 수술로 15㎏이 빠져 너무 수척해진 나머지 더 이상 전국을 다니던 전투적 투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올해도 농사를 지어 꽃차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하시는 목소리가 너무 힘없고 쓸쓸해서 난 좀 울컥했다.

하지만 박은숙과 권귀영이 있었다. 물론 그녀들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박은숙은 아이 넷을 거의 다 키웠고,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는 대신 ‘스리 잡’을 뛰고 있었다. 하나는 밥벌이로 노인 레크리에이션 강사, 또 하나는 밀양765㎸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 마지막은 어르신 뜸 봉사. 그녀는 여전히 당차고 활기가 넘쳤다. 마을공동체가 산산이 무너진 후 홀로 산다는 이유로 마을에서 ‘왕따’를 당하던 권귀영은, 이제 더 이상 고립과 모욕을 감내하지 않는다고 했다. 무조건 마을 행사에 나가서 밥을 했고, 덕분에 보상받으라고 윽박지르던 이웃집과도 이제는 데면데면하게나마 말을 섞고 살게 되었다.

그리고 청년 남어진이 있다. 2013년 10월, 고등학생이던 그는 밀양 할매들이 포클레인 앞에서 목에 쇠사슬을 감고 있는 모습을 접하고 충격을 받아 밀양으로 향한다. 그 이후 어진이는 “매일매일 밥을 얻어먹어버렸고, 얻어먹은 밥만큼만 밥값을 해보려고 애쓰다가” 밀양 송전탑 반대운동을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최근에는 작은 목공소도 열어 밥벌이를 하고 있다. 그런데 어진이는 요즘 좀 우울하다. 싸움의 대상은 분명치 않고 투쟁의 동력은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송전탑 반대운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운동 끝에 소멸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에 우리가 만난 어진이는 탈송전탑 운동에서 기후정의 투쟁까지, 현장에서 버티고 사는 사람만이 갖는 구체적 식견과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번 밀양행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박은숙, 권귀영, 남어진 사이에서 벌어지는 ‘티키타카’였다. 감기가 잔뜩 든 어진에게 ‘귀영 엄니’는 밥을 먹으라고, ‘은숙 엄니’는 뜸을 놓겠다고 잔소리하는데, 어진이도 만만치 않아 계속 싫다고 도리질을 해댔다. 하지만 은숙 엄니는 결국 뜸을 놓았고, 귀영 엄니는 기어코 누룽지를 먹였다. 어진이는 우리를 보고 “내가 죽으면 아마 귀영 엄니 잔소리 때문일 거예요”라고 투덜거렸지만 내가 보기에 이들은 톰과 제리 이상의 찰떡궁합이었다. 실제 요즘 밀양 싸움을 전국으로 이어가는 것은 어진이와 박은숙, 권귀영 등이라고 한다.

헤어지기 전 어진이가 밀양 맛집에서 점심을 사겠다고 했다. 우리는 기꺼이 영세 청년 자영업자의 그 밥을 얻어먹었다. 그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든 생각. 잔소리로 서로의 삶에 개입하고, 밥으로 서로의 삶을 돌보는 이상 밀양 싸움은 결코 끝날 수 없는 것 아닐까? 할매들은 싸움의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땅을 돌보고 삶을 가꾸었던 할매들의 마음은 누군가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4월에 다시 만나기로 했다. 이번에는 밀양 주민들이 우리에게로 온다. 우리도 멋진 밥을 지어놓고 기다릴 것이다.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이희경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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