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을 보신 분들은 주인공 강인구(하정우 분)가 현지 군인에게 ‘코리아 트레디셔널 커피’라며 커피 믹스를 선물하는 장면을 기억하실 겁니다. 군인이 맛있게 마시는 장면과 함께요. 먼저 인스턴트커피 이야기를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가장 인기 있는 커피로 부상했다고 합니다. 인스턴트커피는 프랑스의 유머작가이자 저자인 알퐁스 알레가 1881년 처음으로 발명했고요. 스위스 네슬레사가 1938년 네스카페 브랜드로 인스턴트커피를 출시했습니다. 미군에 보급된 게 바로 네스카페고요.
수리남? 커피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역이죠. 네덜란드 서인도회사가 1712년 수리남에서 라틴아메리카 최초로 커피 실험 재배를 시작했습니다.
<커피의 시대>(장수한 지음, 제르미날) 한 축은 각 대륙의 커피 이야기입니다. 재배와 유통, 수용과 전파 등을 다루죠. 커피 같은 원자재가 착취의 산물이라는 점은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책도 여러 곳의 착취 역사를 전합니다. 더 나아가 착취에 서린 젠더 문제를 들춰냅니다.
여러 사례가 나옵니다. 1859년 인도 마두리 등지의 커피농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는 남성과 같은 일을 하고도 남성 일당(3펜스)의 절반가량만 받았다고 합니다. 이곳 농장주들은 또 다른 이유로 여성 노동자를 선호했습니다.
커피 농장에서도, 집에서도 가부장적 지배에 놓인 여성 노동자들
가족관계를 갖지 못한 소수 여성은 성적 착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가족을 둔 여성들은 가정폭력과 육아 부담에 시달렸지요. 니카라과 등지의 라틴아메리카에서도 19~20세기 여성노동자들은 상급자가 아랫사람에게 행사하는 위로부터의 가부장적 지배와 가족 내부에서 행해지는 가부장적 지배에 놓였습니다.
저자는 왜 젠더 문제를 부각할까요?
나름의 대응 방법을 스스로 선택해 저항하다
남성 노동자나 여성 노동자가 착취를 그저 받아들인 건 아닙니다. 책은 멕시코혁명 시기(1910~1940)와 혁명 이후 코르도바 등지의 노동조합이 여성의 노동 조건을 위해 싸운 일도 전합니다. 여러 지역 주민들은 강제노동에 저항하거나 되도록 일을 적게 하는 방법으로 대응했습니다. “소극적일지라도 그들 나름의 대응 방법을 스스로 선택하여 저항”한 것입니다. 이 대목에선 저자의 역사관이 나옵니다. 세계체제론이나 종속이론보다는 엑릭 볼프의 새로운 문화인류학적 해석에 주목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새로운 시각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유명한 문화인류학자 에릭 볼프Eric Wolf는, 종속이론이나 세계체제론이 주변부 보통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삶을 형성하고 이익을 지키려고 한 노력들을 간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볼프는 세계 도처의 현지인들이 무역이 창출한 새로운 기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고 했으며 동시에 지배에 저항하려 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역사적 설명을 시도한다. 그는 수마트라의 소규모 커피생산자들이 이익을 얻기 위해 커피생산과 무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부각한다. 수마트라의 생산자들은 커피생산을 자발적으로 채택한 사람들로서 산간지대를 개간하여 다른 경제작물과 함께 커피를 경작했다. 이렇게 해서 얻은 작물 다양성은 커피가격이 출렁이는 시기에 울타리 역할을 했고 단일작물 플랜테이션을 공격한 녹병 등의 질병으로부터 커피를 보호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다시 말하면 수마트라 소규모 커피생산자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대응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가져온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을 볼프는 강조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대응이 갖는 한계가 없지는 않지만 이런 문화인류학적 해석은 원주민들을 역사의 주체로서 관찰한다는 점에서 커피의 생산과 교역의 이해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성과라고 하겠다.
커피 마실 사람이 없다는 것은 친구가 없다는 것
어둡고 무겁고, 딱딱한 이야기만 나열된 책은 아닙니다. 실내 공간을 가득 채운 커피향처럼 깊고 풍부한 커피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커피는 애초 마시는 게 아니었습니다. 커피 시원지 카파(kaffa 또는 kafa다. ‘Ka’는 ‘신’, ‘Afa’는 ‘만물이 소생하는 땅’이다. 즉 ‘신이 주신 풍요로운 땅’을 뜻한다)를 둔 에티오피아의 최대 종족인 오로모족이 커피를 부수어 기름과 섞은 뒤에 골프공만 한 크기로 둥글게 만들어 먹었다고 합니다. “자기네 부족을 때려눕히곤 하던 봉가족과 전투를 벌이기 전에 이 커피 공을 깨물어 먹었다”고 하네요. 커피의 의미도 전합니다. 나중에 전통 토기 주전자인 ‘제베나’에 끓인 물에 커피 가루를 넣어 약 5~8분 정도 더 끓인 커피를 대접하는 문화가 생겼습니다.
커피는 에티오피아 등 여러 지역에서 “볶은 다음 갈아서 뜨거운 물에 내려 마시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저자는 프랑스의 인류학자이자 구조주의자로 알려진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아마존지역의 수렵 채집 부족들을 관찰하고, 그들 신화를 살피면서 날것과 익힌 것 사이 이중의 대립이 있음을 찾아낸 일을 예로 듭니다.
신랑감이 마음에 안 들면?
오스만제국도 커피의 주요 역사를 담은 곳입니다. 16세기 초반 시리아에서 발전한 커피 분쇄기는 오스만제국에서 널리 사용됐죠. 오스만제국의 그림자놀이에도 등장합니다. 오스만제국의 커피하우스에선 지금 카페처럼 음악이 계속 흘렀다고 합니다. 튀르크 사람들이 연주하는 일이 많았고, 주인에게 고용된 음악가들도 거의 하루 종일 연주나 노래를 했습니다.
튀르크 스타일의 커피는 만들기 힘듭니다. 비등점에 오르자마자 커피 물이 갑자기 끓어 넘치죠.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신부를 고를 때 조신함을 확인하려 예비신부로부터 커피 대접을 받아보는 일이 하나의 풍습으로 자리 잡기도 했죠. 예비 신부들이 판단 대상이 된 건만은 아닙니다. 신랑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커피를 엎질렀다고도 합니다.
이스탄불의 커피하우스는 미소년 매춘을 주선했다고도 합니다. 바그다드 커피하우스에선 “잘 차려입은 미소년들”이 고객들에게 커피를 제공했고요.
항구에 선적만 하고 ‘모카커피다’
원산지 표기에 얽힌 이야기도 나옵니다. 커피는 지금은 원산지 지명을 상표로 사용해 거래하죠. 20세기 처음 나타났다고 합니다. 품질이 낮은 다른 생산지의 커피를 섞어 고급 커피처럼 높은 가격으로 판매하는 일을 방지하려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그전에는 수출항 이름을 달았죠. 예멘 생산 커피 수출항이 ‘모카 항구’였습니다. 저자는 “ ‘모카커피’는 세계 최초의 커피브랜드”라고 말합니다. 인기가 높다 보니, 몇몇 투기적 수출업자는 브라질 산투스를 예멘과 자바로 보내 그곳에서 최종 선적을 하면서 “모카커피” 또는 “자바커피”라고 우겼다고 합니다.
새가 심은 커피나무…커피 먹고 흥분한 염소 이야기는 사실일까
커피를 두고 “세계인이 사랑하는 음료”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죠. 커피에 관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합니다. 책에서 눈에 들어온 건 “새가 심었다”는 말입니다. 옛 농부들이 커피나무를 두고 한 말이라고 하네요. 새들이 열매 과육을 먹고, 씨앗은 다른 곳에 버렸죠. “커피나무가 주변 지역으로 자손을 퍼뜨리는 일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고, “새와 커피나무가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공존 공생하는 것을 탁월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노예들이 열매를 먹고 씨앗을 뱉으면서 커피나무를 확산하는 데 이바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죠. 단, 확인된 사실은 없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커피 기원이나 발견, 효능을 두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특히나 많죠.
카파에는 염소가 커피 열매를 먹고 밤새 자지 않고 날뛰는 걸 보고는 왕이 구워 먹고, 빻아 음료로 먹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장 유명한 건 아라비아의 ‘칼디와 춤추는 염소’ 이야기입니다. 열매를 먹고는 흥분한 염소와 이를 목격한 목동, 열매를 음료로 만든 수도승이 등장합니다. 튀르키예 버전도 아라비아 것과 비슷합니다. 염소가 양으로 바뀌었을 뿐이죠.
저자는 커피를 둘러싸고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밝히려 합니다. 저자는 커피 인문학자인 윌리엄 유커스가 1922년 <올 어바웃 커피>라는 책을 내면서 프랑스 무명 화가가 그린 한 소년과 춤추는 염소들을 그리고는 ‘칼디와 춤추는 염소들’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커피음료의 전설적 발견’이란 부제를 단 삽화가 퍼지면서, “구체적인 사실”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커피의 효능을 신비화하고 과장하는 전설뿐만 아니라 로맨틱한 이야기들도 많죠. 저자는 “커피에 로맨티시즘의 아우라가 덧입혀지면 소비의 증대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신화와 전설의 확대 재생산에 이바지한 중요 요소”라고 말합니다.
새로운 ‘계몽’에 이바지한 음료
<자연의 악>(알렉산드르 옛킨트 지음·김홍옥 옮김, 에코리브르)을 다룬 책건문에서도 커피하우스를 짧게 다루었죠.
이 책에도 커피하우스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844년 8월28일 처음으로 만난 곳이 프랑스 카페 르 프로코프입니다. 에밀 졸라가 1898년 <나는 고발한다>를 쓴 곳이 카페 뒤랑이고요.
영국 식민지 시절 미국 독립운동의 주동자 즉 “아메리칸 혁명의 지도부”는 차를 멀리하고 대신 커피를 선택했죠. 반대를 표명한 차를 계속 마실 수 없었기 때문이죠.
독립운동가들의 주요 장소 중 하나가 될 것을 미리 알았다면 영국은 커피하우스를 폐쇄했을 것입니다. 전례도 있죠. 영국은 1670년대 들어서면서 체제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자 커피하우스를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찰스 2세는 1675년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악습” 반대를 내걸고 커피하우스를 공격했죠. 바로 “1676년 1 월 10일 이후부터 커피, 초콜릿, 셔벗 그리고 차를 소매로 파는 것을 금지한다”고 선언한 겁니다.
반역이 시작되거나 음모를 꾸밀 여지 때문에 오스만제국 등 여러 곳에서 커피하우스와 커피를 금지했습니다. 무라트 4세(1623~1640) 시대 시민들과 불온한 군인들의 모임 장소로 지목되면서 수십 년 동안 커피하우스는 문을 닫아야 했죠.
저자는 커피하우스(카페) 공간의 의미를 높게 평가합니다.
커피하우스에서 사람들은 서서히 자유롭게 ‘말하기’라는 기법을 터득했고 그 내용은 새로운 ‘사고’로 승화되었다. 이 과정을 거쳐 사람들은 공적이고 제도적인 부문에 대한 비판의식을 길렀고 마침내 새로운 시대정신을 일깨웠다. 커피는 새로운 ‘계몽’에 이바지한 음료였고 커피를 마시면서 사람들은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제도와 사고체계로부터 해방을 도모하게 되었다. 커피하우스가 지배계층의 박해에 여러 번 직면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이미지와 역할이 낳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현대의 카페도 여성을 끊임없이 배제했다
다만 당시 커피하우스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평등한 젠더 중립적인 사회적 세계”는 아니었습니다. 근대 커피하우스의 토론도 여성에게는 금단의 영역이었죠. 현대에 접어들어서도 ‘카페와 여성 차별’ 문제를 두고 석학 2명의 의견이 엇갈립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카페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은 경제적·정치적 신분과 같은 모든 사회적 신분을 무시(또는 동일시)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커피하우스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인정받는 사람은 훌륭한 주장을 펴는 사람이었습니다. 페미니스트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커피하우스가 일부 사람들을 위한 정치적 토론 공간이었을 뿐이고, 무엇보다 여성을 끊임없이 배제했다고 말합니다. 프레이저가 보기에 커피하우스는 “새로운 정치적 지배 형태”였을 뿐입니다.
저자는 “모든 시기에 모든 커피하우스가 하나같이 똑같았다고 보는 오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며 이런 이견들을 전합니다.
저자는 커피의 음용 관습과 코드 의미도 살핍니다. “‘뜨거운 커피’가 강제하는 시간의 느림, 지연 또는 ‘지속’은 ‘이성적인 시간 지속’이란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갖는 코드의 항들”이라고 말합니다. 뜨거운 커피 마시기는 ‘자기 통제’이기도 했습니다.
뜨거운 커피 마시기는 커피잔의 발전을 불러옵니다. ‘구별 짓기’도 일어났죠.
1700년 이전 유럽 사람들은 튀르크 사람들처럼 손잡이가 없는 큰 사발로 커피를 마셨습니다. 프랑스에선 타스(tasse)라 부르던 작은 잔이 16세기 독일로 넘어와 타세(tase)가 됐다고 합니다. 19세기 프랑스에서 드미타스(demitasse)라 부르던 잔은 지금 에스프레소 잔으로 쓰입니다. 지금은 ‘데미타세’로 알려졌죠. 18세기 초 손잡이를 단 커피잔이 독일에서 나옵니다. 독일사람들은 받침 잔도 처음으로 도입했습니다. 저자는 “커피는 격식 없이 마시는 사발 대신 자기통제와 조심성을 드러내는 작은 잔에 담아 마셨고 그렇게 마시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문화적 취향이 되었다. 부르디외가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사발’과 ‘타스’는 차별화 의도를 담은 문화와 취향의 대립물이었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커피의 미시사 또는 일상생활의 역사로 관심을 확장하고, 심화한 책이라고 말합니다. ‘평화의 음료’ ‘금기의 음료’ ‘노동 증대를 위한 각성제’ ‘폭음과 만취에 대항하는 강력한 수단’ 등등으로 불린 각 시대 문화, 역사를 꼼꼼히 살핍니다. 커피 추출 기술과 볶기 등 커피에 관한 ‘A~Z’가 다 들었습니다.
저자의 주제 의식과 관점은 뚜렷합니다. 커피나무와 화학약품 사용과 농부들의 건강, 공정무역 커피의 공정성과 스타벅스의 공정커피 홍보, 국제 유기농 인증제도의 소규모 농가와 기관 간 불평등 문제도 들여다본 뒤 “거창하지 않지만 지속 가능성에 도움이 될 제안”을 건네며 책을 끝냅니다. “(전문가나 다국적기업의 마케팅에 휘둘리지 않게) 커피향미를 제대로 알아보자” “(소규모 시장 권력 회복과 신선한 커피 이용을 위해 운송 시간 등이 긴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보다) 동네 로스터리 카페를 이용하자” “생두의 원산지를 표시하도록 요구하자” 등입니다.
저자인 역사학자 장수한은 20년이 넘도록 직접 커피를 볶아 마신다고 합니다. 앞서 <유럽 커피문화 기행>과 실용서 <인디 커피 교과서>를 냈습니다. 한국 커피 역사는 다른 한 권에 따로 담아 자세히 다루어야 할 중요한 주제라 넣지 않았다고 하네요. <커피의 시대>는 한국 커피 역사에 관한 다음 책을 기대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다른 책들을 다 읽어보지 않아서 최고의 커피 역사책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주와 참고문헌을 보면 수백 건의 자료가 나옵니다. 충실하게 업데이트한 책이란 건 분명해 보입니다.
커피 관련해선 10여 년 쓴 <매혹과 잔혹의 커피사>(마크 펜더그라스트 지음·정미나 옮김, 을유문화사)도 떠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