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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수 접는 마음

입력 2024.02.21 20:18

수정 2024.02.21 20:20

펼치기/접기

동네 카페, 앞 테이블에 앉은 아빠와 아이가 종이접기에 한창이다. 동영상을 보고 따라 접는 모습에서 신중함과 열정이 동시에 느껴진다. “방금 어떻게 한 거야? 다시 앞으로 좀 돌려보면 안 돼?” 손이 느린 아이가 아빠에게 부탁을 한다. “실은 아빠도 제대로 못 봤어. 다시 함께 보자.” 마음 너른 아빠가 아이에게 속삭인다. ‘다시’와 ‘함께’에 힘입어 아이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영상 속 실력자가 종이 접는 모습을 바라본다. 머릿속으로는 종이를 열심히 접고 있는 1분 뒤 자기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어릴 적 빳빳한 종이를 보면 양가감정이 들었다. 그 팽팽함에 경이로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에 흠집을 낼지 싶어 조바심이 일었다. 가만 보고만 있으면 좋으련만, 빳빳한 종이는 자신을 어서 만지라고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종이 위에 큼지막하게 글씨를 써서 이름표를 만들까. 좋아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적어 남몰래 건넬까. 누가 보면 안 되니까 종이를 절반 접어서 줘야겠지. 내친김에 종이접기를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간단하게는 비행기나 배, 공들여 학이나 토끼, 장미를 접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이내 그 마음을 접어버렸다. 나는 뭘 만드는 데는 도통 재주가 없었다.

아빠와 아이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지막으로 뭘 접어본 적이 언제였는지 아득했다. 성인이 된 이후, 고이 접기보다 마구 구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쓴 듯싶었다. 가차 없이 써둔 원고를 구길 때면 마음도 함께 구겨졌다. 그것을 다시 펴도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었다. 구겨지지 않은 척했으나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떤 글은, 일은, 감정은 구겨진 채로 한동안 방치되다가 앙금으로 남는다는 것을. 종이를 접었다가 폈을 때는 흔적이 남는다. 그 흔적을 따라 다시 잘 접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구겨진 마음은 다시 펼쳐도 호둣속처럼 복잡하기만 하다. 그 주름들을 하나하나 헤아릴 엄두가 좀체 나지 않는다.

종이를 접지는 않았으나 나는 나대로 접는 일을 해오고 있었다. 책장 귀퉁이를 접는 일은 어떤 구절이나 장면에 마음을 내어주는 일이었다. 접는 일은 내가 무엇에 흔들리는지 알게 해주었다. 접은 흔적들을 한데 모으면 내 취향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상대 의견을 잘 듣고 따르는 일은 내 주장을 접는 일이었다. 모든 사안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따지고 토씨 하나하나까지 꼬투리 잡는 일은 여유를 앗아갔다. 쓸데없이 고집을 피우고 돌아올 때면 심신이 다 무거웠다. 접어야 가벼워질 수 있었다. 내 의견을 접고 나서야 상대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의견을 접는 일은 소신을 굽히는 일이 아니었다. 다각도로 생각하고 꼼꼼히 따져서 마침내 신중해지는 일이었다.

접는 일은 또한 원래의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일이기도 했다. 우산을 접거나 부채를 접듯, 펴지기 전의 상태로 향하는 일이었다. 달아오르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평정심을 되찾는 일이기도 했다. 상대의 잘못을 접어 생각하는 일은 관용적인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에서 비롯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내가 몰랐던 나의 허물을 발견하는 통로가 되어주었다. 하던 일을 접는 것은 단순한 포기가 아니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가리켜 실패라고 할 테지만, 나는 몰두하고 있던 일을 접을 때마다 내가 나에게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집합을 알아야 내가 집중할 부분 집합이 또렷해진다.

무엇보다 한 수 접는 마음을 알게 된 것이 좋다. 한 수 접는다는 표현은 바둑이나 장기에서 상대 수준에 맞추어 자기 수준을 낮추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내 수준이 높다는 말이 아니다. 기성세대와 가까워진 지금, 나는 새로운 세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함을 절감한다. 앞서 아빠와 아이가 몸소 보여주었듯, 접는 일은 ‘다시’와 ‘함께’로 새판을 펼치는 일이기도 하다.

오은 시인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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