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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한 숟가락은 줄어들기를

입력 2024.02.22 20:12

수정 2024.02.22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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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기니산 조기 눈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뒤집히고 뒤집힌 배가 검게 그을릴 때까지

기름이 연기가 될 때까지

밤을 벗어난 아침은 상을 차린다

차례와 제사는 하나의 형식


페루산 오징어와 칠레산 포도

기니산 조기와 미국산 오렌지

국산 도라지도 올라간다


허겁지겁 식사를 하는 검은 눈에 쳐진 그물들

‘내년이면 이 집도 슬픔이 한숟가락은 줄어들 겁니다’


뒷밥을 문밖에 내놓는다

지나가던 검은 눈의 방글라데시인 칸씨도

터키인 쇤메즈씨도

중국인 리우씨도

탈북인 김씨도

형태를 알 수 없이 일그러진 무연고자씨도

허겁지겁 음복하는 문 앞

한술 뜨는 수십개의 손들

젓가락이 놓친 공기들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조기의 눈들처럼


텅 빈 입이 둥둥 떠다니는 씨들

생이 일찌감치 거덜 난 씨들

다시 발이 없이 멀어지는 씨들


칼끝이 바깥으로 향하는

다국적 식탁 앞에서

-시 ‘다국적 식탁’

이설야 시집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 본 세상과 딴판이다. 마을 지붕도 산도 나무도 논밭도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하얗게 평등하다. 새가 잠깐 날아가다 금세 자취를 감춘다. 우수(雨水)부터 내리던 비가 나흘 넘기더니 눈이 되었다.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아기 쑥처럼 고개를 내미는데 봄은 멀다. 덤불 사이에서 올라오던 쑥들은 어찌 될까. 눈 천지가 되면 새와 고양이는 무얼 먹고 사나.

설이 엊그제 같은데 대보름이 코앞이다. 어릴 땐 대보름날이 떠들썩하니 재밌었다. 꽹과리며 징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나면 장정들이 왁자지껄 들어와 마당을 몇 바퀴 돌다, 마루에 걸린 바구니를 내려 음식을 나눠먹었다. 김으로 동그랗게 감싼 찰밥과 색색 나물들과 전들이 든 소쿠리는 참 아름다웠다. “차례와 제사는 하나의 형식”이라지만, 음식을 차리다 보면 새삼 삶 바깥에 있는 존재들을 생각하게 된다. “무연고자씨”들에게 음식을 차려 “문밖에 내놓”는 ‘뒷밥’은 더더욱 삶의 너머 혹은 이면을 되씹게 한다.

제사나 대보름 쇠고 난 뒤 조상을 따라온 객귀들에게 바가지에 밥과 나물과 반찬들을 담아 문 앞에 내놓는 뒷밥이나 거리밥은 참 눈물겨운 풍습 같다. 숟가락을 있는 대로 모두 걸쳐놓은 밥상을 둘러싸고 “텅 빈 입이 둥둥 떠다니”며 “허겁지겁 음복하는 문 앞/ 한술 뜨는 수십개의 손들”과 “발이 없이 멀어지는” 모습을 떠올리는 일은 아프다. 돈 벌러 왔다 타국에서 목숨을 잃은 “방글라데시인 칸씨”와 “터키인 쇤메즈씨”와 “중국인 리우씨”와 “탈북인 김씨”와 “형태를 알 수 없이 일그러진” 입들을 생각하는 일은.

근처 일하러 왔다 들른 조카에게 이것저것 싸 보냈다. 얼리고 말린 먹거리와 땅콩과 사과는 물론 신문지에 싸서 스티로폼 박스에 담아놓은 배추와 저장 무도 조카에게 환대받는 것 같았다. 예전 같으면 짐만 될까 봐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배추 겉은 데쳐서 국 끓여 먹으라 했더니, 어떻게 이 비싼 걸 국 끓이냐고, 쌈 먹고 싶어서 마트에 갔더니 알배추도 5000원 하더란다. 국산 땅콩이 중국산보다 네배나 비싸서 국산은 갖다놓지도 않는단다.

소박한 밥상이나마 “생이 일찌감치 거덜 난” 이에게 뒷밥쯤은 놓아두는 둥근 달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밥 앞에서, 밥줄이 끊긴 사람들과 없는 사람 취급당하며 쇠사슬 두르고 굴뚝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동료들을 옆에 앉히는 심정이었으면. “서로 다른 국적을” 지닌 호두와 땅콩이라도 “내년이면 이 집도 슬픔이 한숟가락은 줄어들 겁니다” 위로하며 더불어 밥 먹는 세상을 기원했으면. “기니산 조기와 미국산 오렌지”라도 “허겁지겁 식사를 하는 검은 눈에 쳐진 그물들”을 잊지 않았으면 참 좋겠다.

김해자 시인

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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