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동구 코끼리빌라
“그거 어디서 파는 거여?” 경복궁 서쪽 동네, 이른바 서촌에 사는 최성욱(사진)씨가 집 여기저기에 ‘뽁뽁이’를 칠 때였다. 옆집 노인이 최씨네 마당에 성큼 들어오며 뽁뽁이란 물건을 궁금해했다. 최씨가 꿈꿔온 한옥살이를 시작한 2010년, 여름은 그저 좋았다. 마당에서 빔프로젝터로 온갖 영화를 다 틀어댔다. 그런데 한 10월쯤 되자 겨울처럼 차가운 공기가 툇마루를 쓸었다. 한옥에 갓 이사 온 청년이 찬 바람 좀 막아보려고 산 뽁뽁이가 거의 평생 한옥살이를 한 노인의 눈에 참 신통해 보였나 보다.
당시 최씨는 서촌에서 두 갈래 주민을 봤다. 한쪽은 개발파다. 불편한 한옥 따위 싹 밀어버리고 아파트를 짓자고 했다. 다른 쪽은 보존파다. 무슨 소리냐, 그래도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맞섰다. 최씨는 보존파를 지지했는데, 그때 노인에게 뽁뽁이 정보를 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옥? 지켜야지. 하지만 집도 나이를 먹는다. 이 낡은 집을 지키고만 살라는 건 이런 노인에게 폭력적인 일 아닐까?
3년 후 최씨는 네덜란드에 있었다. 학교에서 늙어가는 도시의 대안을 연구하고 관련 회사도 다녔다. 바다를 메워 국토의 4분의 1을 만든 나라에서 최씨가 경험한 건 ‘와이 낫(Why Not·왜 안 돼)?’ 정신이었다.
이게 될까 했는데 ‘Why Not’ 정신이 통했다
100년 된 정수장, 1유로에 임대
네덜란드 ‘1유로 프로젝트’처럼
한국서도 3층짜리 주택 ‘실험’
가드닝 등 17개 브랜드 입주
성악 배우기·반려견과 요가 등
매주 다양한 프로그램 제공
주민 참여 늘며 성공 사례로
예컨대 100년 된 정수장이 있다. 쓸모없어진 지는 꽤 됐다. 어느 날 누군가 나타나서 싸게 넘겨주면 뭐라도 해보겠단다. 네덜란드 사람들의 반응은 이런 식이다. “왜 안 돼?” 명목상 1유로만 받고 맡겼더니, 정수장이 호텔과 레스토랑, 텃밭이 어우러진 ‘핫플’이 됐다. 마약과 매춘이 들끓어 가난한 이민자도 떠난 슬럼가는 예술가들이 교류하는 동네로 바뀌었다. 그 사회에는 이렇게 놀리는 공간을 단 1유로에 10년, 50년 동안 선뜻 내주는 정부와 건물주가 있었다. 이른바 ‘1유로 프로젝트’. 이게 조물주 위에 건물주가 군림한다는 한국에서도 될까?
최씨는 “도시의 가장 좋은 인테리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가 그 도시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네덜란드의 정수장과 슬럼가의 변화에서 얻은 결론이다. 문제는 좋은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좋은 사람들에게 공간을 내어줄 ‘좋은 건물주’를 어떻게 찾느냐는 거다.
귀국 후 이런저런 도시재생 프로젝트에 손을 대던 중 서울 성동구 송정동 사무실로 한 50대 사업가가 찾아왔다. 최씨는 처음엔 “그냥 투기하시는 분”인 줄로만 알았다. 아, 3층짜리 다가구주택을 사셨군요. 그런데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요. 음, 혹시 3년만 저한테 맡겨보지 않으실래요? 이 건물주의 반응은 뜻밖에도 ‘와이 낫?’이었다. 2023년 2월, 곰팡내가 진동했던 송정동 코끼리빌라에서 한국 최초의 1유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송정동은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본 것만 같은 동네다. 1980년대 정부는 폭발적으로 불어난 인구를 감당하기 위해 ‘한 지붕 세 가족’ 같은 거주 형태를 허용하거나, 정환이와 덕선이가 살던 1~2층 주택을 3~4층 빌라로 바꾸는 재건축을 촉진했다. 코끼리빌라도 딱 그쯤인 1989년 지어졌다. 송정동의 시간은 그 무렵에서 멈췄다. 그래서 많이도 낡고 긁히고 부서졌지만, 그만큼 정겨움도 묻어나는 동네다.
이런 곳에서 1유로 프로젝트는 뭘 하느냐고? 쉽게 말하자면 ‘동네 백화점’이다. 송정동은 벚꽃길로 유명한 송정제방길을 끼고 자리했고, 한양대·건국대 등 4개 대학에서 멀지 않다. 오래된 저층 주택이 많아서 다양한 세대와 계층의 사람들이 진입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 다만, 씻고 잠을 잘 집 말고는 다른 ‘뭐’가 없다는 게 문제다. 근래 성동구의 성장을 견인한 성수동과 꽤 가깝지만, 송정동은 그 흐름에서 소외된 것처럼 보였다. 1유로 프로젝트는 그 ‘뭐’를 채우고자 하는 플랫폼이다.
최씨가 코끼리빌라에 입주할 브랜드를 모집했더니 86개가 신청했다. 그중 17개를 엄선했다. 가드닝, 웰니스, 자연주의, 제로 웨이스트 등 다채로운 테마의 브랜드가 모였다. 얼핏 백화점 같아 보이는데, 이들은 월세나 보증금을 내지 않고 수익도 온전히 가져갈 수 있다. 아니, 이건 ‘청년몰’보다 입주 조건이 훨씬 더 좋잖아?
자선사업도 아닌데 이게 다일 리가 없다. 모든 브랜드에 누누이 강조하는 규율이 있다. “좋은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프로그램을 계속 생산해야 한다.” 모든 브랜드는 한 주에 한 번 이상 사람들을 불러모을 프로그램을 궁리하고, 그 계획서를 제출한다. 지역 활성화라는 1유로 프로젝트의 정체성에 맞다고 판단하면 승인한다. 이를 어기면 페널티를 주는데, 일정하게 쌓이면 그 브랜드는 짐을 싸야 한다.
이 규율에 힘입어 코끼리빌라에서는 매주 뭔가가 일어난다. 다 같이 뱅쇼 만들고 마시기, 골목을 누비며 쓰레기 줍기, 방학을 맞은 자녀와 모빌 만들기, 교회 성가대 활동에 유용한 성악 배우기, 반려견과 더 깊게 교감할 수 있는 요가하기…. 매주 일요일 옥상에는 안 입고 안 쓰는 물건을 대방출하는 7일장이 선다. 그렇게 송정동에서 1년을 버텼더니, ‘1EURO PROJECT’가 무슨 회사 간판인 줄 알았던 송정동 주민들도 이곳을 슬슬 기웃기웃하더란다.
1년 새 코끼리빌라는 전국에서 가장 유명한 다가구주택이 됐다. 배우 원빈, 가수 바다 같은 연예인도 이 작은 빌라 건물을 찾았고, 사업적으로 접점을 만들어 보려는 기업과 도시재생 성공 사례가 절실한 지방자치단체 여러 곳이 문을 두드렸다. 건물까지 콕 집어주며 1유로 프로젝트를 운영해 달라고 타진한 지자체도 있다. 대전, 청주, 제주 등 각지에서 ‘로컬’에 관심 있거나, 자신의 부동산 활용 방안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코끼리빌라를 찾는다.
이렇게 셀럽, 힙스터, 혹은 관계자들의 즐겨찾기 목록에 오른 건 분명 성과다. 하지만 1유로 프로젝트의 진짜 목표는 3년 동안 반짝인기를 누리고 사라지는 팝업(Pop-Up)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동네 인프라다. 최씨는 동네가 낡아가며 주거지로서 매력은 점점 떨어지는데, 그렇다고 근처 성수동처럼 상권이 일어나지도 않아 다른 무엇이 되지 못하고 방치된 집을 요즘 눈여겨본다.
계획은 대략 이렇다. 올해 상반기 중 송정동에서 빈집 스무 채를 모은다. 여기에 성수동을 겨냥한 게스트하우스와 공유오피스를 공급하는 것이다. 이 시설의 이용자는 송정동에 조금씩 진입 중인 카페 등 상가의 소비자이면서, 상권을 키우는 촉진자가 된다. 이들이 송정동에서 보내는 하루는 대략 이렇다. 아침 일찍 코끼리빌라에서 요가·명상 프로그램을 이용하고, 가까운 카페에서 브런치를 즐긴다. 일이나 관광을 마치고 저녁에 송정동에 돌아오면 취향이 맞는 사람들과 와인이나 요리를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또 기다린다.
새로운 발상은 아니다. 보통 ‘커뮤니티 호텔’이라고 부르는 아이디어다. 호텔이 1층 리셉션과 로비, 2층 레스토랑과 컨벤션, 3~9층 객실, 10층 헬스와 요가, 루프톱 바와 카페가 적층된 수직적 건물로 사람을 끌어모은다면, 커뮤니티 호텔은 지역에 흩뿌려진 이런 공간들을 서로 연결해 수평적 호텔로 재구성한다. 정선, 군산, 공주 등 지방 중소도시에 ‘마을 호텔’이란 이름으로 비슷한 시도가 많다. 서울 서촌에도 있다. 이들은 폐광촌, 구도심, 한옥 등 지역에 깃든 나름의 이야깃거리를 매만졌다. 송정동에선 어떤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까? 일단 성수동이 가까워서 좋다. 코끼리빌라 같은 붉은 벽돌 건물이 많아 향수를 자아낸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엔 어떤 건물주의 선의가 있다. 이 이야기는 더 많은 건물주가 함께할수록 아마 더 풍성해질 것이다.
어쩌면 1유로, 겨우 1400원으로 꽤 많은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유로 프로젝트는 오늘도 착한 부자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회사, ‘착한 부동산 개발회사’가 되는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