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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명만 모여도 세계는 복잡해진다

요즘 즐겨보는 예능에는 열두 명의 출연자가 나온다. 거기엔 평생 친구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을 때까지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한마디만 듣고도 나는 그들이 대충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회차가 거듭될수록 알게 된다. ‘나 이 사람들 잘 모르네.’ 상종하기도 싫었던 이의 말에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고, 미더웠던 자의 말이 실은 텅 비었음을 알아차리고, 딴 데서 만났으면 적이었을 자가 귀여워보여서 당황스러워진다. 화제의 예능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이하 ‘더 커뮤니티’)를 보는 동안 내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열두 명의 출연자는 9일간 한 공간에서 가명으로 생활한다. 밥을 해서 나눠먹고 주간에는 노동을 하고 야간에는 익명 채팅으로 토론을 한다. 여느 서바이벌 예능처럼 각자도생하며 최후의 1인이 되기 위해 애쓸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흥미롭게도 <더 커뮤니티>에서의 생존은 반드시 혼자 살아남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도 살고 너도 사는 시나리오도 고민할 수 있게끔 고안해두었다. 하지만 당신도 상상할 수 있다시피 열두 명이 대화로 합의에 이르는 건 온몸이 배배 꼬일 정도로 지난한 과정이다.

게다가 이들은 서로 다른 배경과 정치적 입장을 지녔다. 찢어지도록 가난해서 직업군인을 선택한 사람과, 고급 중식당에서 베이징덕을 한 번 못 먹었던 일을 인생에서 유독 힘들었던 경험으로 꼽는 부잣집 자제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 모두가 비슷한 월급을 받는 국가에서 살고 싶은 사람과 절대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다. 이토록 다른 사람들이 한 집단의 제도를 처음부터 만들어가는 꼴을 보고 있자면 민주주의가 얼마나 아름답고 복장 터지는 시스템인지 매순간 알게 된다.

점수로 말할 수 없는 당신

이 와중에 모두에게 아침마다 차를 내려주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하마(작가)다. 하마는 열두 명 중에서 타자들을 가장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인물이다. 거의 모든 면에서 반대 입장을 취하는 보수 남성이나 반페미니스트 여성과도 정중하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예기치 못하게 등장한 이주민을 격 없이 환영한다. 먼저 좋아하고 먼저 믿는 하마의 능력은 강점이자 약점으로 작용한다.

한편 대화를 압도적으로 주도하는 이는 슈퍼맨(국민의힘 정치인)과 백곰(더불어민주당 정치인)이다. 이들에겐 남성화된 관료적 언어가 있다. 제일 치열히 부딪쳐야 할 것 같지만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관계이기도 하다. ‘너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 하는 기류가 이들 사이에 흐른다. 그들의 논리정연한 말하기는 누군가가 입을 열기 망설이게끔 하는 문턱일 것이다. 이들은 리더를 욕심낼 만큼 야심차고 이런저런 원대한 공약들을 내놓지만 누락되는 시민들이 생겨난다. 열두 명만 모여도 세계는 아주 복잡해진다.

정치는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재분배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며 그것은 곧 누구를 더 시급히 살릴지를 고민하는 일이다. 탈락 위기에 처한 사람의 생존을 두고 다같이 토의하던 자리에서 묵묵히 듣던 슈가(남성 잡지 모델)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누구를 살리냐 마느냐를 판단할 때 그의 쓸모(이 집단에 그의 능력이 필요한가)가 기준이 된다는 게 무서웠다고. 또 다른 맥락에서 잠자코 있던 사람은 하마다. 모두의 현실 속 연봉이 공개되던 순간, 고소득자일수록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를 때 하마만이 입을 다문다. 돈을 더 잘 버는 사람이 더 나은 사람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마는 기억해낸다. “우리는 이 기준으로 절대 범주화될 수 없는, 그렇게 스테레오 타입화될 수 없는 독특한 사람들이지. 나도 그렇지.” 그는 사상점수가 적힌 모니터가 가려지도록 천을 덮어둔 뒤 사람들을 만난다. 전혀 유창하게 말하지 않는 동료의 비언어적 뉘앙스를 섬세히 캐치하고, 서로를 애정하는 것이 어째서 시스템에도 이로운지에 관해 설득한다.

우린 진정한 동료가 될 수 있을까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민주주의>의 저자 최태현 교수는 인간의 마음이 민주주의의 첫 번째 집임을 거듭 이야기한다.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더 커뮤니티>의 하마를 통해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문제를 해결했다고 착각하는 것은 누군가를 진정한 동료 인간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나의 문제가 개선되는 사이에 누군가의 문제가 악화되는 삶의 역설은 빈번히 발생한다. 이 역설은 수많은 타인을 내 마음에 둘 때에만 겨우 논의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의 마음을 지닌 자는 어쩔 수 없이 겸손할 것이다.

열두 명 중 미지의 상대를 향해 가장 크게 열려있던 하마의 눈동자를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하마가 사는 나라에 살고 싶다고. 하마가 살고 싶은 나라의 진정한 동료 인간이 되고 싶다고. 그가 보여준 놀라운 시민성과 환대의 능력을 어떻게 잊을까 싶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헤엄출판사 대표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헤엄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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