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오전 서울 은평구 불광동 연신내역 인근 연서시장. 전날 9중 추돌사고가 발생해 아수라장이 됐던 현장이었지만 이튿날인 이날 상인들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분주한 아침을 보내고 있었다.
“일을 하고는 있는데 일이 손에 안 잡혀서 죽겠어. 손이 덜덜 떨리고 머리가 아프고. 돌아가신 분이 하루도 안 거르고 박스 가지러 와서 매일 마주쳤는데….”
사고 현장 인근에서 건강기능식품 판매점을 운영하는 유모씨(77)가 말끝을 흐렸다. 유씨는 “고인이 ‘원래 다섯 리어카는 모아야 하는데 오늘은 두 리어카밖에 없다’며 아쉬워할 때도 있었다”라고 했다.
전날 오후 5시쯤 연서시장 앞 도로에서는 70대 운전자가 몰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승용차 7대와 이륜차 1대를 잇달아 들이받아 1명이 숨지고 13명이 다쳤다. 사망자는 70대 보행자 임모씨였다. 서울 은평경찰서에 따르면 운전자 A씨는 연서시장 인근에서 우회전하면서 좌회전해 오던 차량과 1차로 충돌한 뒤 300~400m가량 질주해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은 뒤 길을 건너던 보행자 임씨를 덮쳤다. 경찰은 79세인 A씨가 사고를 낼 당시 술이나 마약에 취한 상태는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사고 다음 날인 이날 오전 임씨가 매일 폐지를 주우러 다녀가던 농수산물 가게 한편에는 고인이 쓰던 리어카가 놓여 있었다. 리어카 위에는 임씨가 미처 가져다 팔지 못한 상자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농수산물 가게를 운영하는 B씨는 “‘박스 아저씨’가 1~2년 전부터 매일 왔기 때문에 얼굴을 자주 봤지만 이름이나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한다”라며 “키가 작고 마른 체형이라 힘들어 보였는데도 매일같이 열심히 오셨다”라고 말했다.
이웃 주민들은 임씨를 ‘말수가 적은 사람’으로 기억했다. 유씨는 “가끔 우리 가게에 들러서 시계만 보고 가곤 했다”라면서 “농담으로 시계 볼 거면 돈 내고 가라고 하면 ‘휴대전화 시계가 작아서 잘 안 보인다’며 허허 웃기만 했다”라고 말했다. 유씨는 “폐지 줍는 일을 하기 전에는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고 하더라”라고 했다. 임씨가 모은 폐지를 팔았던 고물상 관계자 C씨는 “말수가 적어 어떤 분인지 잘 모르지만 하루에 200㎏ 정도 되는 폐지를 서너 번에 나눠 가져오셨다“라며 “하루 만원 좀 넘게 벌었을 것”이라고 했다.
임씨가 그와 친하게 지내던 이웃이 세상을 떠난 지 하루 만에 숨졌다며 안타까워하는 이도 있었다. 임씨 주거지 인근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허태연씨(63)는 “고인이 막걸리 한두 병을 자주 사가서 건너편 철물점 아저씨와 나눠서 먹었다”라며 “둘이 가장 친하게 지냈던 사이인데, 고인이 사고를 당하기 하루 전에 철물점 아저씨도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채 발견됐다”라고 말했다. 허씨는 “지난주 초까지만 해도 같이 계시던 것을 봤는데 뒤따라가신 것 같아 너무 안타깝다”라고 했다. 인근에서 부동산을 운영하는 이모씨(72)도 “어떻게 친했던 양반 둘이 하루 차이로 돌아가시나”라며 “철물점 아저씨 장례식장에 다녀오던 길에 사망 소식을 또 듣게 돼서 너무 놀랐다”라고 했다.
고인처럼 폐지를 주우며 생계를 이어가는 노인들도 황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임씨가 자주 가던 곳 바로 옆 가게에서 폐지를 줍는다는 조춘자씨(81)는 주민들에게 사고 소식을 듣자 “정말 초상이 난 거냐”고 되물었다. 조씨는 “근처에 폐지 줍는 노인네들이 많아 서로 얼굴을 안다”라면서 “워낙 착하고 조용했는데 술을 많이 먹어서 어제까지만 해도 ‘아바이, 술 작작 마셔요’ 했다”라고 말했다.
임씨의 유족은 별도의 빈소를 차리지 않고 가족끼리 조용히 장례를 치를 것으로 전해졌다. 은평경찰서 관계자는 “자세한 사고 경위 등은 조사 중”이라며 “운전자가 회복되는 대로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입건할 계획”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