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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규제 풀라는 KDI 보고서…‘왜곡 통계’로 썼다

반기웅 기자
KDI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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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개발연구원(KDI)이 국내와 해외의 대기업 일자리 비중을 비교하는 보고서를 내면서 서로 기준이 다른 통계를 활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은 실제보다 대기업 일자리 비중이 낮게 측정된 통계를, 다른 나라는 대기업 일자리 비중이 높게 집계된 통계를 토대로 국내 대기업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대기업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국책연구기관이 친기업 기조를 보이는 정부 입맛에 맞춰 통계를 선택적으로 적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전임 정부의 통계조작과 왜곡 문제를 제기하며 감사원 감사와 검찰 수사를 벌이는 현 정부의 산하 연구기관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점에서 통계 오류 시정과 함께 책임 규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기업 일자리 14%에 불과하다는 KDI…실제로는 32% 이상

지난달 27일 KDI가 낸 KDI 포커스 ‘더 많은 대기업 일자리가 필요하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대기업(300인 이상·공공기관 포함) 일자리 비중은 전체 14% 수준(2021년 기준)이다. 해당 수치는 통계청의 ‘전국사업체조사’에서 가져왔는데, KDI는 해당 통계를 근거로 한국의 대기업 일자리 비중이 미국(58%), 영국(46%), 독일(41%)에 비해 크게 낮다고 강조했다. 대기업 일자리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 수준인 만큼 국내 대기업 규제를 풀어 일자리를 더 늘려야 한다는 게 KDI의 주장이다.

그러나 KDI가 인용한 사업체 기준 대기업 일자리 비율은 현실보다 낮게 측정된 수치다. 통계 정의상 ‘사업체 단위’는 일정 장소 또는 일정한 지역 내에서 단일 또는 주된 경제활동에 독립적으로 종사하는 기업체 또는 기업체를 구성하는 부분 단위를 뜻한다. 각 사업장을 독립된 사업체로 간주한다는 의미다.

예컨대 사업체 단위 조사에서는 대형 은행 소속 직원이라도 300인 미만 은행 지점에서 일하는 경우 중소기업 노동자로 분류한다. 사업체 조사는 은행 지점 등을 별개의 사업체로 보기 때문에 대기업 종사자 비중은 현실보다 적게 나올 수밖에 없다.

대기업 일자리 비중 낮게 나온 통계 ‘선택적 적용’

이 때문에 정부·기관에서는 실제 대기업 종사자 비중을 파악할 때 주로 ‘기업체 기준’ 조사를 활용한다. 기업체 기준 조사는 지점과 같은 사업장을 독립된 사업체로 보지 않고 동일 기업 소속으로 간주한다. 은행 지점 소속 노동자도 대기업 종사자로 분류된다. 통계청 2022년 일자리행정통계(기업체 기준)상 국내 대기업(300인 이상·공공기관 포함) 일자리 수는 858만개로 전체의 32.4%에 달한다. KDI가 제시한 수치와 2배 넘게 차이가 난다.

보고서를 작성한 고영선 KDI 선임연구위원(연구부원장)은 “기업체 기준으로 집계한 일자리 행정통계가 있다는 있다는 사실은 몰랐던 부분”이라며 “기업체 기준으로는 (결과가)달라질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달 발간한 KDI 포커스 ‘더 많은  대기업 일자리가 필요하다’ 중 발췌. KDI는 해당 연구보고서에서  한국의 대기업 일자리 비중이 OECD 최하위라고 명시했다.

지난달 발간한 KDI 포커스 ‘더 많은 대기업 일자리가 필요하다’ 중 발췌. KDI는 해당 연구보고서에서 한국의 대기업 일자리 비중이 OECD 최하위라고 명시했다.

비교 대상군인 OECD의 대기업 일자리 비중도 왜곡된 수치다. OECD는 직원 250명 이상의 기업을 대기업으로 분류하는데, 회원국 대부분은 ‘기업체 기준’으로 집계한다. 기업 통계가 없는 나라 등 예외적인 경우에만 사업체 조사 등으로 대체한다. OECD 통계는 사실상 기업체 기준 조사에 가깝지만 KDI는 이 같은 차이를 설명하지 않고 마치 동일한 기준인 듯 비교해 보고서를 냈다. 결과적으로 한국 대기업 비중은 축소하고 OECD 수치는 부풀려 사실을 과장한 셈이다.

KDI “기업체 기준 일자리행정 통계 존재 몰랐다”

이에 대해 고 선임연구위원은 “보고서 작성 당시에는 OECD 통계가 사업체 기준으로 집계한 것으로 간주했는데, 확인해보니 OECD는 기본적으로 기업체 단위로 집계한 것으로 보인다”며 “동일한 기준으로 나열하면 (국가별 대기업 비중)순서가 바뀔 것”이라고 했다.

노동계는 KDI가 정부의 친기업 기조에 맞춰 의도적으로 통계를 왜곡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업체 기준 대기업 일자리 통계 오류가 수차례 공론화 된 상황에서 전문 연구기관인 KDI가 이 같은 차이를 몰랐을 리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통계청 일자리행정통계는 해마다 KDI 홈페이지 경제정보센터에 올라오는 통계 자료다.

출근길에 오른 시민들이 광화문네거리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출근길에 오른 시민들이 광화문네거리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김정근 선임기자

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은 “기업체 기준 통계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KDI의 답변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무책임한 해명”며 “대기업 규제를 풀고 지원을 늘리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 입맛대로 통계를 취합해 맞춤형 보고서를 낸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계 “대기업 규제 완화 주장하려 입맛대로 통계 선택”

과소 추산된 대기업 일자리 통계 문제는 앞서 박근혜·문재인 정부 시절 ‘중소기업 9988’이 이슈가 되면서부터 논의된 바 있다. ‘9988’은 중소기업이 대한민국 전체 기업의 99%, 고용 인원의 88%를 차지한다는 뜻으로 높은 중소기업 비율을 강조하기 쓰이는 용어다. 그러나 사업체 기준 조사를 토대로 만든 용어여서 통계 착시 문제에 대한 지적이 제기돼 왔다. 이 때문에 2019년에는 중소벤처기업부가 나서 기업단위로 집계한 국제기준 중소기업 기본통계를 만들기도 했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은 “통계청 일자리행정통계뿐만 아니라 고용노동부의 고용 공시제를 봐도 실제 대기업 일자리 비중을 확인할 수 있다”며 “사업체 기준으로 대기업 일자리가 적게 나오는 이유는 그만큼 대기업들이 사업체를 쪼개고 하도급을 많이 쓰고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제라도 KDI가 보고서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강국 일본 리쓰메이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의 노동시장 이중 구조는 개혁해야겠지만 국내 대기업 일자리 비중을 놓고 국제 비교를 할 때는 정확한 통계와 수치부터 파악해야 한다”며 “KDI가 기업체를 기준으로 기존 보고서를 업데이트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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