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살 여름방학에 소피는 곧 서른한 살 될 아빠와 튀르키예로 여행을 떠난다. 별거 중인 아빠와 일 년 만에 함께 보낼 시간인 만큼 아이는 신이 났다. 캠코더로 장난스레 아빠를 인터뷰하고 관광버스 유리창에 반사된 얼굴도 찍는다. 시간이 흘러 서른한 번째 생일을 맞은 소피는 낡은 캠코더에 녹화된 이십 년 전 영상을 재생한다. 어린 자신이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그 시절 아버지의 깊은 우울과 불안을 거기서 읽어낸다.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아이 곁을 뜰 것을 예감하며 그전에 부모로서 알려줄 것을 전하려 서둘렀던 젊은 남자의 강박을 뒤늦게 헤아린다. 영화 <애프터썬>은 이렇듯 끝내 온전히 복원하진 못할 과거 한 시점의 기억 조각을 담는다.
이 영화를 두고 누군가 평했다. 저마다 사적 경험이 포개지는 면적만큼의 감동을 가져갈 거라고. 난 ‘그 시절 아빠의 내면’을 헤아리고자 제한된 기록과 기억을 꿰맞추는 딸의 간절함에도, 아이에게만큼은 좋은 기억을 만들어주려던 부모의 안간힘에도 이입할 수 없었다. 원가족과 절연했고 사랑하는 이와 혼인해 꾸린 가정 또한 갖지 못했으니까. 대신 다른 경험이 겹쳐졌다. 멀리서 찾아온 딸과 일 년 만에 시간 보내는 분을 일인칭 주인공 아닌 관찰자 시점으로 지켜봤던, 수년 전 여름 몇날들의 기억.
함께하는 내내 딸의 감정을 살피며 안절부절못하시던 모습에 당시 ‘딸바보’라며 몰래 웃었지만, 영화 보며 생각했다. 바랜 사진으로조차 본 적 없는, 딸이 열한 살일 무렵의 젊었을 그는 어쩌면 캠코더 속 소피 아빠와 닮지 않았을지. 자기 삶이 전쟁일지라도 떨어져 지내 온 아이한텐 티 없이 즐거운 방학을 선물하고 싶어 하던. 과거 한 시점에 그 또한 등을 새우처럼 구부린 채 어둠 속에 홀로 울었을까. 난 이십여 년을 거슬러 올라가 그 젊은 사람의 등을 토닥이고 싶었고, 다음 순간 상상으로라도 그래선 안 됨을 자각했다. 상대에게 특별한 의미가 아닐 관찰자는 이해든 연민이든 품을 자격이 없었으니까. 사적 경험이 포개진 면적은 내겐 그저 쓸쓸함의 크기였다. 그렇게 극장을 나와 터덜터덜 걷던 중 아까 본 사소한 장면이 부지불식간에 떠올랐다. 뜻밖의 장면이었다.
소피와 아빠는 유원지 당구장에서 만난 두 청년과 복식 게임을 한다. 한 명이 “소피 쟤 당구 존나 잘 치네” 감탄하자 다른 하나가 “야, 애 앞에서 그런 단어 쓰지 마” 제지한 후 서둘러 사과한다. 사춘기 초입의 소녀에게 그 둘은 수줍은 호기심의 대상이었겠으나 그들에게 소피는 보호할 존재였다. 고작 예닐곱 살 위였을 그들은 어른 노릇을 해주려 한다. 키스하는 연인을 지나칠 때 아직 넌 저걸 보면 안 된다며 아이의 눈을 가리고, 아빠와 다툰 아이가 밤늦도록 야외식당에 웅크리고 있자 다가가 “네 아빠 찾아줄까?” 근심스레 묻는다. 그 순간 화면 안에 감돌던, 서툴고 조심스러운, 미묘한 안온함.
어릴 적 타국에 살던 무렵 그곳 한인성당엔 예닐곱 살 위의 교포 2세 오빠들이 몇 있었다. 언젠가 저희끼리 거친 농담을 주고받다 저편에 선 나를 발견한 한 명이 “애 앞에서 그런 단어 쓰면 어떻게 해”라 친구들을 나무랐다. 다가와 미안하다고, 방금 들은 건 잊어달라 했다. 대여 서고에서 내가 고른 책을 보더니 이건 네 나이에 읽을 게 아니라며 다른 책 골라준 적도 있었다. 알 것 다 안다고 믿던 열두살 아이는 그들의 어설픈 어른 노릇이 내심 우스우면서도 싫지 않았다. 미묘한 안온함을 그때 느꼈다.
오래 잊고 지낸 언어화하기 어려운 감정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춘 채 살아났다. 관계 조건이나 자격을 요구하지 않는, 살결의 살결 같은 나만의 기억. 생의 한 시절 스친 이들이 무심히 만들어준 저 기억 조각 덕에 내 사적 경험은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비로소 영화와 포개졌고, 감상 중 일부나마 나눌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