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부터 올해까지 361화 연재
“독자 댓글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장그래 주인공 차기작 웹툰 준비”
바둑에서 ‘미생’(未生)이란 완전한 두 집이 나지 않아 생사가 불분명한 돌을 뜻한다. 완생(完生)을 향해 달리는 보통 사람들의 삶과 닮았다. 만화가 윤태호(55)의 <미생>은 바둑에 인생을 걸었지만 입단에 실패한 청년 장그래가 종합상사에 입사해 겪는 우여곡절을 그렸다. 2012년 1월17일부터 올해 2월12일까지 12년 만에 연재가 끝났다. 시즌1은 145화, 시즌2는 216화로 전체 361화다. 바둑판의 착점 수와 똑같다.
윤태호를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슈퍼코믹스스튜디오에서 만났다. 한국 직장인들은 매주 <미생>이 올라오면 열렬한 공감을 담아 댓글 수백 수천개를 달았다. 윤태호는 “독자들이 달아주는 댓글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며 “어떤 독자께서 ‘<미생>은 댓글까지 읽어야 다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동의한다”고 말했다.
“댓글들을 전부 읽어요. 출판만화를 그릴 때는 독자들의 반응을 직접 체감할 수 없었거든요. 독자들의 평가가 응원이 되기도 했고 반성의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언젠가 이야기가 안 풀려서 질질 끌던 적이 있었어요. ‘변죽만 울리고 앉았네’라는 댓글이 그렇게 아프더라고요. 사실이었으니까요. 하하.”
윤태호는 실제 아마추어 10급 수준의 기력(棋力)을 갖췄다. 바둑 만화를 고민하던 중에 당시 출판사가 ‘바둑’과 ‘직장인’을 엮은 이야기를 제안했다. 출판사는 ‘고수’(高手)라는 제목을 원했지만 윤태호는 직장생활 하수(下手)인 청년을 주인공으로 ‘미생’이란 제목을 정했다. “비록 입단에는 실패했지만 바둑으로 갈고 닦여진 청년이 사회와 마주하며 사회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다양한 독자층을 염두에 두고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인 종합상사를 배경으로 골랐어요.”
<미생> 12년 연재의 최대 위기는 언제였을까. 윤태호는 2014년 드라마 <미생>과 2015년 영화 <내부자들>이 ‘대박’을 터뜨렸을 때를 꼽았다. 윤태호는 유명해졌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비정규직 노동정책에 ‘장그래법’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세상이 좀 무서워졌습니다. 나는 그저 작품을 그렸을 뿐인데 ‘사람 미치는 것이 한 순간이구나’ 했어요. 저를 찾는 사람이 너무 많아지고 주변이 산만해졌어요. 그때 <파인>도 연재할 때였는데 도망가듯이 두어달 휴재했죠. 세상의 관심과 멀어지고 싶었어요.”
많은 독자들은 <미생>에 ‘디테일이 소름 돋는다’는 댓글을 달았다. 윤태호는 사무실 책상부터 업계 용어는 물론 기업의 의사결정 과정까지 세밀하게 묘사했다. 지독하리만큼 성실한 취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실제 종합상사, 한국무역보험공사,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 직원들을 수차례 만나 인터뷰했다. “회사가 전쟁터라고? 밀어낼 때까지 그만두지 마라. 밖은 지옥이다.” “먼지 같은 일을 하다 먼지가 되어 버렸어.” “나는 우리 가정이란 회사의 악성 채무자다.” 독자들의 가슴을 울린 수많은 명대사도 윤태호가 인터뷰한 ‘조력자’들에게서 나왔다.
해외 출장 에피소드를 그릴 땐 요르단에 4회, 가나에 1회 직접 날아가 현지 상황을 조사했다. 개인 비용만 3000만원을 넘게 썼다. 힌국 기업에게 사기를 당한 요르단 중고차 부품업체 사장 타르칸의 에피소드는 현지에서 취재한 실화다. 당시 윤태호가 ‘한국에 민원을 넣을 생각을 하지 않았냐’고 묻자 타르칸 사장은 ‘인샬라’(신의 뜻대로)라고 대답했다. <미생>에선 장그래가 타르칸 대신 사기꾼들에게 법의 철퇴를 내린다.
“어떤 편집자들은 ‘왜 그렇게까지 취재하느냐’고 하지만 저는 공부하고 싶어요. 그런 디테일들이 들어가면 스스로 만족하니까요. 타르칸 사장 이야기도 현장에 가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것이죠. 뒷마당에 펼쳐놓은 불량 부품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샬라’라는 말에 되게 부끄러웠어요. 만화 속에서라도 정의구현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타르칸이 나중에 제 만화를 보고 굉장히 좋아했어요.”
윤태호는 자신의 청년 시절이 분노와 열등감으로 가득했다고 회상한다. 집안 형편이 가난했다. 원하던 미술대학 입시에 실패했다. 허영만의 문하생이 되기 전에는 노숙 생활까지 했다. 만화를 연재할 기회를 어렵게 얻었지만 잡지가 폐간됐다. 30대 윤태호가 그린 <야후>의 청년 김현은 한국 사회의 트라우마가 응집된 폭탄이었다. 50대 윤태호가 그린 <미생>의 청년 장그래는 자신과 사회를 용서하고 받아들인다. 윤태호는 자신의 나이듦과 변화에 만족하는 것으로 보였다.
“장그래는 분노가 없죠. 남을 핑계대지 않으니까. 제가 청년 시절에 가졌던 분노는 지금 생각하면 남 핑계예요. 자신을 혼내기 싫어서 사회 핑계를 댔다는 느낌이 들어요. 저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많이 달라졌어요. 일본 만화에 이런 표현이 나오는데, 아이들을 보면 ‘이런 나라도 좋아해줘서 고마워’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하하. 제 성글었던 과거가 희석되는 것 같아요.”
윤태호는 다시 장그래가 주인공인 웹툰 <미생 멀티버스>(가제)를 차기작으로 준비 중이다. 평행우주에 사는 장그래가 종합상사가 아닌 다른 회사에 취직하는 이야기다. 현재 2화까지 그렸다. 올해 추석쯤에 공개할 예정이다. “장그래는 제 캐릭터 중에서 가장 긍정적인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놓아버리고 싶지 않네요. 유튜브에서 평행우주를 봤던 기억도 나서 제로(0)에서 시작하는 장그래를 만들려고 합니다. 짜잔, 하고 보여드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