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의 유언과 ‘공심’

장지연 대전대 역사문화학 전공 교수

태조 왕건은 고려의 다른 국왕과는 위상이 완전히 다르다. 시조라는 점 때문만이 아니라 고려 400여년 동안 반신반인 정도로 숭배를 받던 존재라 그렇다. 예를 들어 고려의 양대 축제라는 연등회와 팔관회는 태조 왕건에게 고하는 것으로 의례를 시작한다. 수도인 개경만이 아니라 지방 곳곳에 그 초상을 모신 진전이 있었고, 전쟁이나 지방의 반란 진압 같은 큰일이 있을 때면 이러한 진전에서 일이 잘되기를 기원하곤 했다.

왕건으로 이어지는 왕실 조상의 혈통도 신비화되었다. 건국 설화에는 당대 유행한 온갖 요소를 다 집어넣었다. 그래서 태조의 조상 중에는 산신도 있고, 명궁수도 있으며, 오줌 꿈을 꾼 할머니, 심지어 당나라 황제와 용왕의 딸도 있다. 또 도선만이 아니라 팔원이라는 풍수사까지 그 집과 그 고을의 풍수를 봐주며 왕업의 개창을 예언했다. 궁예처럼 미륵이라고 하지만 않았을 뿐 나머지 유행하던 요소는 다 넣었고, 고려 왕실은 용손을 자처했다. 왕권이 위태로울 때면 이런 혈통적 신비함에 기대는 이들이 더욱 극성했다. ‘태조가 시작했다’든가 ‘태조가 예언했다’는 등의 딱지가 붙은 일들이 늘어나고, 목전의 일들은 회피한 채 신비한 효과를 노리는 일들만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 땅의 덕을 보완한다는 궁궐이 늘어나고, 새롭게 연 절, 거창한 행사가 많아졌다. 권력의 꼭대기에서 그런 사업을 좋아하니, 그런 종류를 찾아내서 건의하며 출세하는 사람들도 무성했다.

정작 왕건은 자신이 인간이라는 점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는 병세가 깊어지자 천하의 온갖 사물이 태어나면 다 죽는 것이 천지의 이치라며 태자에게 정치를 일임했다. 그 며칠 후 유조(유언으로 남기는 조서)를 불러주다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으니, 신하들은 왕이 죽은 줄 알고 목 놓아 울었다. 그러자 웃으면서 “인생이 원래 덧없는 것이다”라고 하고는 잠시 후 세상을 떠났다. 왕건은 신격화를 거부하고 사람으로서의 삶과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왕건은 왕위 역시 이런 신성성이나 혈연의 특별함에만 기댈 수 없다는 점을 잘 알았다. 왕위 계승의 원칙을 담은 훈요 제3조에서, 그는 맏아들의 자질이 모자라면 그다음 아들, 그다음 아들도 안 되겠으면 추대를 받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라고 했다. 그러면서 요 임금이 순 임금에게 선양한 일, 즉 자기 자식이 아닌데도 왕위를 물려준 일을 언급했다. 요 임금이 그렇게 한 것은 바로 ‘공심’ 때문이었다고 말이다. 여기에서 ‘공심’은 요즘 말로는 여론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혹은 권력을 공적으로 여기는 마음이라고도 풀이할 수 있다. 어느 쪽이건 혈통에 의한 세습 왕조를 세웠음에도 왕위라는 것이 내 맘대로 막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1100년 전에 말이다.

그러나 고려 말, 어리석게도 이러한 ‘공심’에 대한 시조의 경고는 무시한 채, 국왕들은 엉뚱한 방향으로 시조를 계승하겠다고 몰두했다. 공양왕은 연복사라는 큰 절을 짓고 연못 세 개와 우물 아홉 개를 파면 중흥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임금이 이런 일에 몰두할 때 아래에서는 뇌물이 횡행하고 아무나 관직을 얻었으며, 옳고 그름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잠시라면 사람들이 이런 권력의 현란한 아우라에 현혹될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하루하루의 일상이 그 권력의 효용과 공정함을 확인하고 평가하게 되어 있다.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지 않고 신성함의 아우라에만 기대려 한 고려 왕실은 결국 망했다. ‘친분으로 사사롭게 관직을 주면 아랫사람들이 그 사람을 원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오래갈 수가 없다’고 한 훈요 9조의 엄중한 경고는 왕건이 수십년간 죽을 위기를 거쳐가며 나라를 세우면서 피부로 절감한 ‘공심’에 대한 이야기다. 1100년 전에도 무섭던 ‘공심’, 21세기에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장지연 대전대 역사문화학 전공 교수

장지연 대전대 역사문화학 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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