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나는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식구회의를 열었다. 영화를 보러 갈 때도, 여행을 갈 때도, 용돈을 올려줄 때도, 옷이나 신발을 살 때도, 학원과 학교를 선택할 때도, 어떤 일이든 식구회의를 열어 결정했다. 지금은 그 아이들이 다 자라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고 산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식구들은 만나기만 하면 식구회의를 연다.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고 앞으로 살아갈 이야기도 나눈다. 그리고 서로 덕담을 나누기도 한다.
나는 식구회의 때, 자식들에게 한평생 소박하고 가난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가끔 한다. 이오덕 선생님 말씀처럼, 가난해야 물건을 귀하게 쓰고, 가난해야 사람다운 정을 가지게 되고, 그 정을 주고받게 된다.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이 넉넉해서 흥청망청 쓰기만 하면 자기밖에 모르고, 게을러지고, 창조력이고 슬기고 생겨날 수 없다. 무엇이든지 풍족해서 편리하게 살면 사람의 몸과 마음이 병들게 되고, 무엇보다도 자연이 다 죽어버린다.
우리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일본으로 끌려가 목재소에서 일하다 발목을 다쳐 한평생 다리를 절고 다녔다. 그래서 어머니가 3녀4남 많고도 많은 자식을 먹여 살리느라 목장 일에 공사장 일까지 마다치 않으셨다. 한평생 일밖에 모르고 사셨던 어머니는 영양실조에 골병까지 들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 가난이 대를 이어 오늘까지 내려왔다. 그러니까 우리 자식들은 아무리 부지런히 일해도 부자가 될 가능성은 없다. 아무튼 나는 가난한 부모 덕으로 가난한 농부들과 땀 흘려 일하고, 일하는 사람 귀한 줄 알고 산다.
우리 자식들이 부자가 되면 안 되는 까닭은 하늘에 떠 있는 별만큼이나 많다. 한 사람이 부자가 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이 가난해질 테니까. 정직하게 땀 흘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길 테니까. 사람이고 자연이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돈으로 보일 테니까. 함부로 먹고 마시고 쓰고 버리고 허깨비처럼 살다 보면 아이들이 살아갈 ‘오래된 미래’인 숲(자연)을 짓밟을 테니까.
숲이 얼마나 소중한지, 숲에서 자라는 나무 한 그루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지 누구나 다 안다. 아랫마을에 사는 정순씨는 노인요양원에 출근한다. 하루 내내 몸과 마음이 아픈 어르신들을 돌보는 일이 어찌 고달프지 않겠는가. 그런데 출근길마다 고달픔을 덜어주는 나무가 있단다. 산기슭에 하얗게 보이는 자작나무 한 그루란다. 그 나무만 보면 마음이 어쩐지 위안이 되고 힘이 솟는단다. 몇십억짜리 아파트나 몇백억짜리 고급 빌딩을 하루 내내 본다고 해서 이보다 더 큰 위안이 되겠는가.
나무 한 그루도 이렇게 사람을 살맛나게 하고 희망을 안겨준다. 하물며 우리를 살리는 산밭에서 자라는 감자와 고구마와 옥수수는, 쉬지 않고 흐르는 작은 개울에서 살아가는 버들치와 송사리는, 낮은 언덕에 말없이 폈다 지는 구절초는, 대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는, 얼마나 사람을 살맛나게 하랴.
나는 아들네들이 사람과 자연을 살리는 흙에 뿌리내리기를 언제까지나 기다릴 것이다. 하늘이 주신 자연 속에서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갈 그날을 애써 기다릴 것이다. 나무처럼 굳세게 서서 기다리고 또 기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