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찍이 우리나라 선비들 가운데 약간이라도 도의를 사모했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세속적 우환에 걸리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소이다. (중략) 그들이 미진했던 점은 다름이 아니라 학문이 지극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너무 높여 처신한 데 있고, 시의(時宜)도 헤아리지 못하면서 세상을 경륜(經綸)하는 데 용감했기 때문이오.”(<퇴계선생문집>, 권16, ‘기명언에게 답함’) 1559년, 이황이 나아감과 물러남의 도리를 묻는 33세의 젊은 기대승에게 답한 편지의 일부이다. 기대승은 한 해 전 이미 대과에 합격했지만, 스스로 관직에 나아감과 물러섬의 도리에 어둡다고 생각하여 이황에게 그 처신을 물어왔던 터였다.
유학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25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전승되면서 복잡한 이론으로 분화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는 본래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자기 수양(수기)을 통해 개인의 도덕적 인격을 완성하고, 사람들을 다스려(치인) 도덕적 공동체를 완성한다’는 말로 해석되는 ‘수기치인’은 유학자들의 공부 목표를 명확하게 알려준다. 타인을 다스리기 위한 전제가 ‘자기 수양’에 있으며, 모든 유학자들은 이를 선결조건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의 강조이다. “학문이 지극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너무 높여 처신했던 사람들”이라는 이황의 평가는 이러한 기본 조건도 갖추지 못했던 사람들을 향했다.
그러나 자기 수양이라는 전제를 충족했다 해도, 모두 벼슬에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기 수양 여부와 상관없이 ‘시의(時宜)’도 판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시의’는 ‘때에 맞는 적절성’이다. 즉 관직에 진출하려는 그때가 ‘유학의 도, 즉 도덕공동체 구현이 가능한 때’인지 판단해서 출사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전통시대의 경우 대체로 왕이 무도하거나 권력이 부패했다면, 시의에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도덕공동체 구현’이라는 목표를 실현할 수 없으므로, 이를 알면서도 굳이 출사하는 사람들은 출사 그 자체가 목적인 사람들이었다. 이황은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시의도 헤아리지 못하면서 세상을 경륜하는 데만 용감한 사람들”이라고 비판했다.
유학 이론에 따르면, 유학자의 관직 진출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유학자가 반드시 나아가야 할 실천의 최종 목표이기도 하다. 현재 관점에서 봐도, 능력 있는 사람이 관료로 진출하여 공동의 이익을 위해 헌신한다면, 국가공동체에 이보다 더 큰 이익도 없다. 다만 유학은 개인이 준비되지 않았거나, 시대가 준비된 개인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엔 ‘물러서는 게 미덕’이라고 가르쳤다. 조선사회에서 왕이 무도할 때 관직을 버리고 자기 수양에 매진했던 처사(處士)들이 존경받았던 이유이다. 맹자의 말에 따르면 “옛 현인들은 벼슬을 하지 않으려 했던 게 아니라, 올바른 도리에 따라 벼슬하지 않는 것을 싫어했다.”(<맹자>, ‘등문공하’)
그러므로 조정에 어진 관료가 많다는 말은 백성을 어질게 다스리도록 하는 어진 왕이 있다는 의미다. ‘시의’를 만드는 일은 왕의 몫이었고, 자기 수양 조건을 갖춘 유학자라면 왕이 어진 정치를 펴는지 보고 출사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조정에 어진 이가 없다면, 가장 먼저 돌아봐야 하는 사람 역시 왕이다. 어진 이들로 하여금 물러나는 게 명예롭도록 만든 사람이 왕이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유학이 아닌 민주주의 이념에 기반한 국가이다. 그러나 도덕과 수양이라는 말을 합리와 능력이라는 말로 바꾸면 유학의 이 같은 생각은 현재도 유효한 측면이 있다. 그리고 이 논의가 유효하다고 판단되면, 어질고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지 않는 나라에 대한 맹자의 다음 경고 역시 되새길 필요가 있다. “어진 사람을 등용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지, 영토를 빼앗기는 데만 그치겠는가?”(<맹자>, ‘고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