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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비참한 인어공주가 또 있었을까

입력 2024.05.05 11:56

발레 ‘인어공주’ …존 노이마이어 안무·국립발레단 공연

발레 <인어공주>의 한 장면. 공주,  왕자, 인어공주(앞줄 왼쪽부터)와 그들을 지켜보는 시인. 국립발레단 제공

발레 <인어공주>의 한 장면. 공주, 왕자, 인어공주(앞줄 왼쪽부터)와 그들을 지켜보는 시인. 국립발레단 제공

함부르크발레단 예술감독 존 노이마이어는 놀랍게도 안데르손의 <인어공주> 주제를 이렇게 요약한다. “내가 아무리 누군가를 사랑하더라도, 상대가 나를 사랑할 책임은 없다.”

국립발레단이 1~5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200회 정기공연으로 선보인 <인어공주>는 노이마이어가 2005년 안데르센 탄생 200주년을 맞아 로열 덴마크 발레단 의뢰로 선보인 작품이다. 함부르크발레단에서 반세기 이상 재직하며 숱한 걸작을 남긴 노이마이어는 <인어공주>의 안무, 무대, 조명, 의상을 도맡아 안데르센 고전에 대한 총체적이고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인어공주>는 안데르센의 분신인 듯한 ‘시인’이 등장하는 프롤로그로 시작한다. 검은 연미복에 중절모를 갖춘 시인은 사랑하는 남성이 다른 여성과 선상 결혼식을 올리는 광경을 목격한다. 시인의 눈물이 바다에 떨어지며 인어공주가 나타난다. 이후 시인은 줄곧 무대에 머물며 인어공주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의 관찰자 혹은 창조자가 된다. 인어공주는 바다에 빠진 왕자를 구해낸 뒤 그를 사랑하게 된다. 인어공주가 자신을 구했는지 모르는 왕자는 육지의 공주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한다. 인어공주는 왕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바다마녀를 찾아가 꼬리를 넘겨주고 두 다리를 갖는다.

발레 <인어공주>에서 인어공주는 통이 넓고 질질 끌리는 바지로 지느러미를 표현했다. 국립발레단 제공

발레 <인어공주>에서 인어공주는 통이 넓고 질질 끌리는 바지로 지느러미를 표현했다. 국립발레단 제공

발레 <인어공주>의 한 장면. 왕자의 사랑을 받지 못한 인어공주는 정신병원에라도 갇힌 듯 하얀 벽을 거칠게 두드려댄다. 국립발레단 제공

발레 <인어공주>의 한 장면. 왕자의 사랑을 받지 못한 인어공주는 정신병원에라도 갇힌 듯 하얀 벽을 거칠게 두드려댄다. 국립발레단 제공

<백조의 호수> 같은 고전 발레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인어공주가 슬프거나 고통에 빠지거나 심지어 죽을 때도 발레리나의 아름다운 몸놀림을 기대할 것이다. <인어공주>는 기대를 배반한다. 인어공주가 바다에 있을 때는 아름답다. 다리가 아닌 지느러미를 연출하기 위해, 인어공주는 통이 매우 넓고 발아래로 1m는 족히 끌리는 푸른 바지를 입었다. 3일 인어공주를 연기한 국립발레단 솔리스트 조연재는 불편한 바지를 입고도 바닷속을 자연스럽게 헤엄치는 듯한 유려한 동작을 선보였다. 바짓단을 잘못 밟아 ‘사고’가 날지 모른다는 관객의 걱정을 기우로 만들었다. 때로 검은 옷을 입은 남성 무용수들이 인어공주를 떠받치고 유영했다. 무용수들은 무대 위에 보이지 않는 물이라도 차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움직임을 보여줬다.

인어공주가 꼬리 대신 다리를 가진 순간부터 분위기가 급변한다. 남성 무용수가 연기한 바다마녀는 인어공주의 아름다운 옷과 꼬리를 거칠게 뜯어낸다. 인어공주에겐 피부와 구분되지 않는 살구색 타이즈만 남는다. 마치 벌거벗겨진 채 내팽개쳐진 듯 끔찍한 몰골이다. 인어공주가 처음 발로 땅을 디딘 순간도 처참하게 묘사된다. 인어공주는 마치 전기에 감전되거나 유리를 밟기라도 한 듯 고통에 몸서리친다. 무용수는 고전 발레의 아름답고 우아한 몸짓 대신, 고통을 고통스럽게 표현한다.

발레 <인어공주>에서 사랑을 돌려받지 못한 인어공주는 토슈즈를 거칠게 벗으며 절규한다. 국립발레단 제공

발레 <인어공주>에서 사랑을 돌려받지 못한 인어공주는 토슈즈를 거칠게 벗으며 절규한다. 국립발레단 제공

인어공주의 육지 생활도 참담하다. 인어공주는 다른 사람들처럼 당당하게 걸을 수 없다. 인어공주의 움직임은 걸음을 배우는 유아처럼 여전히 어색하다. 몸놀림뿐 아니라 인어공주의 처지도 딱하다. 인어공주는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왕자에게 구애한다. 정혼자가 있는 왕자는 친절한 미소로 답할 뿐이다. 인어공주는 사랑에 빠져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세계로 건너왔으나 그 사랑을 되돌려받을 수 없다. 인어공주는 가진 것 없이 완전히 낯선 세계로 던져진 이주민 같기도 하고, 내가 온전히 사랑하면 상대도 나를 사랑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진 위험한 스토커 같기도 하다. 어떤 경우로 해석해도, 안데르센이 탄생시킨 ‘작은 인어’(The Little Mermaid)를 이렇게 비참하게 본 사례는 없는 듯하다.

결혼식이 끝나고 왕자는 무대 밖으로 신이 나서 사라진다. 인어공주는 사랑을 돌려받지 못한다. 처지를 깨달은 인어공주는 발레의 상징과 같은 토슈즈를 거칠게 벗어버린다. 인어공주, 그리고 그의 비극을 목격하고 이를 자신과 겹쳐 생각하는 시인만이 무대에 남는다. 무대 위에는 별이 쏟아져 내린다. 하얀 옷을 입은 인어공주와 시인은 하늘로 떠오른다. 프로그램 책자에서는 “둘은 용기를 가지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선다”고 표현했지만,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홀로 됐다가 하늘로 떠오르는 결말을 ‘해피 엔딩’이라 부르긴 어렵다. 디즈니가 유쾌하고 아기자기하게 그려냈고, 때로 ‘실패한 사랑을 통한 성숙’으로도 해석되는 안데르센 원작을 노이마이어는 사랑의 냉정한 속성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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