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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1억 총 연극의 사회

입력 2024.05.08 20:04

수정 2024.05.08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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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직에 계신 분들과 하는 일본공부모임에서 야마구치(山口)현 호후시(防府市)를 방문한 적이 있다. 조슈번 다이묘(長州藩大名)였던 모리(毛利) 가문의 저택과 정원을 보기 위해서다. 메이지유신 후 전국의 다이묘들은 성을 허물고 도쿄에 모여 살아야 했다. 하지만 정국이 좀 안정되자 메이지 정부는 전 다이묘들에게 고향에 거주하는 걸 허락했다. 모리 가문은 조카마치(城下町)였던 하기(萩)나 경제중심지 야마구치 대신 호후에 30만㎡에 달하는 광대한 부지를 마련해 거처로 삼았다. 가신이었던 메이지 정부의 실력자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힘을 써줬다고 한다. 8만4000㎡ 규모의 정원은 가을 단풍이 특히나 절경이다. 저택은 국가에 기증하여 모리씨박물관으로 되어 있다.

넓은 다다미방과 긴 회랑으로 이뤄진 저택을 둘러보다 낡았지만 깔끔한 교복을 입은 여학생 세 명이 부동자세로 서서 다른 학생들을 안내하는 모습을 봤다. “수학여행 왔어요?” “아뇨, 동아리활동 중입니다.” 우리로 치면 근처 학교의 체험학습 같은 것인 듯했다. 몇 마디 더 나누었더니 그중 한 학생이 “그런데 일본어를 왜 이렇게 잘하세요?” 한다. 서른 넘어 익힌 일본어가 그 정도일 리 없지만 외국인 행색을 한 사람이 일본어를 하니 신기했나 보다. 감사하다며 돌아서려는 순간, 일이 벌어졌다. 뒤따라 오던 우리 측 여행 가이드님이 불쑥 “이분 도다이(東大·도쿄대를 줄여 부르는 말) 출신이에요!” 하자, 학생 셋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일제히 “에~~~?” 한다. “게다가 서울대 교수님이에욧!” “에~~~~엣!”, 사태 전개를 예감하고 나는 출구 쪽으로 내뺐지만, 가이드님은 그칠 줄 몰랐다. “일본 역사에 관한 책도 몇 권이나 쓰셨어욧!!” “에~~~~~엣!!” 아이유 노래 ‘좋은 날’의 삼단고음처럼 ‘라’ 음으로 시작한 “에~~”는 ‘시’를 거쳐 ‘도’까지 올라갔다. 좁고 기다란 회랑에서 그 소리는 메아리쳤다.

이 학생들의 삼단고음 현장을 우리 일행이 목격했다. 저 학생들이 왜 저러는지를 가이드님에게서 듣더니 깔깔거리며 재밌어 했다. 이 양반들, 밖으로 나와서는 내가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에~~~!!” 하며 포복절도하는 것이었다. 동작까지 흉내 내며. 즐거웠다.

일본 사회에서는 어떤 경우에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가 대체로 정해져 있다. 사람을 대할 때도 상대방의 저런 말에는 이렇게 응대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매뉴얼 같은 게 존재한다. 사회생활을 잘하려면 매뉴얼대로 연기해야 한다. 아까 그 학생들도 처음에는 진짜 놀라 반응했을 수 있지만, 가이드님이 연이어 TMI(?)를 제공하니 즉각 연기에 돌입한 것이다. 첫 번째 반응보다 두 번째, 세 번째 감탄이 저음이면 상대에게 실례다. 가이드님이 네 번째, 다섯 번째 발언을 하지 않은 것이 그 학생들에게도 내게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어떤 지인의 말대로 일본은 ‘1억 총 연극의 사회’다. 모두가 자신이 그때그때 처한 ‘야쿠(役)’를 연기한다(배우도 야쿠샤(役者)라고 한다). 저 학생들은 순간 놀라는 역을 맡게 되었으니 놀라워하는 연기를 한 것이다. 더욱이 상대가 외국인이니 일본을 대표해서(?) 혼신을 다해 연기한 것이다. 맡은 연기를 벗어나 혼네(本音·본심)를 드러내는 순간 연극은 삽시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다. 그러니 조심조심, 한 땀 한 땀 연기해야 한다.

이런 설명을 했더니 일행 중 한의사 분이 “그럼 그 스트레스를 다 어떻게 해요? 일본 사람도 화병(火病)이 있겠네요” 했다. 화병이 나려면 일단 자주 화가 나야 한다. 그러나 야쿠를 연기하는 게 화나는 일은 아니다. 그저 울적과 체념이 쌓일 뿐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야쿠병(役病)’이라 할 수 있겠다. 몇 마디 말로 일본 사회 전체를 규정하는 것은 경계해야 하나, 이런 관점에서 관찰해 보면 일본과 일본인을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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