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교제살인’ 사건이 재발하면서 교제살인·폭력을 막을 제도적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잇따르는 교제살인·폭력 사건들의 공통점과 특징을 깊이 있게 분석해 그에 맞는 대책을 내놔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6일 서울 서초구 빌딩 옥상에서 동갑 여자친구를 살해한 피의자 A씨(25)는 구속돼 수사를 받고 있다. A씨는 피해자가 “헤어지자”고 말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A씨가 범행을 저지른 건물 옥상은 평소 두 사람이 자주 방문했던 곳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건은 최근 언론을 통해 보도된 다른 교제살인·폭력 사건과 비슷한 점이 많다. 피해자와 ‘친밀한 관계’인 남성이 ‘익숙한 공간’에서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피해자의 이별 통보가 계기가 됐다거나 범행 이전에 이미 폭력을 행사하거나 과도하게 집착하는 등 ‘징조’가 있었던 것도 공통점이다.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장은 “연인 관계에서 일어나는 폭력이라 주변 사람은 알기가 어렵고 피해자는 일상을 지배받는 등 극심하게 고통받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지난 3월 경기 화성시에서 여자친구를 살해하고 여자친구의 어머니에게 중상을 입힌 김레아(26)의 경우도 피해자와 동거하던 오피스텔에서 범행을 저질렀다. 그는 피해자가 이별을 통보하려고 하자 범행을 저질렀다. 평소 피해자의 휴대전화를 수시로 확인해 남자관계를 의심하는 등의 집착 성향을 보였다고 한다. 지난달 경남 거제시에서 20대 남성이 술을 마시고 전 여자친구를 찾아가 폭행해 숨지게 한 사건도 마찬가지다. 이 남성도 피해자의 원룸에 찾아가 범행을 저질렀다. 피해자는 앞서 12차례나 교제폭력 신고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교제폭력 신고 건수는 늘고 있다. 대검찰청은 지난해 3월 발표한 자료에서 “교제폭력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발생해 재범률이 높고 폭력의 정도도 중하다”며 “2022년 검거 인원이 2014년과 비교해 92.4% 증가하는 등 급속한 증가세”라고 밝혔다. 경찰청의 ‘주요 젠더폭력범죄 현황’에도 2022년 교제폭력 경찰 신고가 7만790건 기록됐다. 2020년 4만9225건, 2021년 5만7305건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사태의 심각성과 달리 교제폭력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률적 수단은 ‘공백’ 상태다. 교제 관계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혼인 관계가 아니라서 ‘가정폭력처벌법’ 적용 대상이 아니다. 상대방을 따라다니거나 지켜보는 행위를 처벌하는 ‘스토킹범죄처벌법’도 적용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현장에서 피해자를 적극적으로 분리·보호조치 하기 어렵다. 21대 국회에서 교제폭력 관련 법안들이 발의됐지만 자동 폐기될 공산이 크다.
전문가들은 교제폭력을 중요 강력범죄로 규정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한다. 그래야 실태에 대한 조사와 통계가 따르고 이를 예방하기 위한 제도가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스토킹이나 교제살인 등이 범죄로 자리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적 담론으로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권김 소장은 “경찰이 현장에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분리하는 등 더 강하게 개입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국가가 개입·중재할 사건으로 처리하고 있다는 신호를 주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사건 초기 대응과 예방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장 연구위원은 “교제폭력 사건의 경우 가해자들이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등의 징후가 공통으로 관찰된다”며 “가정폭력 사건을 다루는 것처럼 위험 징후가 있다면 가해자를 상담·치료하는 등 다각도의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