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규칙

최종렬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

어도어 대표이사 민희진의 기자회견이 연일 화제다. 성공한 여성이 격에 맞지 않게 ‘격앙, 눈물, 욕설’을 거침 없이 쏟아냈다며 비판한다. 자신의 감정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사람이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대표라는 게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평정 유지는 대면적 상호작용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감정 덕목이다. 함께 있는 사람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평정을 잃으면 당사자는 물론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사람들조차도 당혹감에 빠진다. 민희진은 평정을 잃고 감정을 날것 그대로 공중에 드러냈다. 옆에 있던 변호사 두 명이 어쩔 줄 몰라하며 상황 수습에 급급하다.

사회학자 혹실드는 모든 상황엔 ‘감정 규칙’이 있다고 했다. 감정 규칙은 감정에 대한 권리와 의무의 조합이다. 우리는 어떤 특정 상황에선 화를 낼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은혜를 입은 사람에겐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할 ‘의무’가 있다고 여긴다. 감정 규칙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감정의 정도, 방향, 지속 기간이 어떠해야 할지 정한다. 혹실드는 감정 규칙을 언급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자아가 아이러니한 태도를 취할 수 있음을 뜻한다고 했다. 전통적인 종교를 실천하는 하위집단은 감정 규칙을 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누구도 그 규칙으로부터 관찰자의 거리를 둘 수 없어 아이러니한 태도를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희진은 하이브가 감정 규칙을 논할 수 없을 정도로 폐쇄적인 하위집단의 감정 구조를 강제한다고 말한다. 가장 창의적인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도 감정 규칙에 거리를 둘 수 있는 아이러니한 자아를 허용하지 않는다? 민희진은 사회구조적 위계를 상징적 공연으로 뒤집는다. 청색 느낌의 보라색 볼캡, 녹색 스트라이프 무늬 티셔츠, 헐렁한 추리닝 바지. 이러한 ‘회견룩’은 민희진이 경영권 찬탈을 노리는 인지적으로 차가운 계산에 능한 CEO가 아니라 현장에서 뒹굴면서 자연스럽게 감정을 표출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것을 전시한다. 민희진은 또한 기자회견에서 허용되었던 감정의 정도, 방향, 지속기간을 모두 헤집어놓는다. 지나치게 화를 내고, 분노와 평정 사이를 급반전하며, 말을 이어나갈 수 없을 정도로 길게 흐느낀다.

민희진은 여성이 공적 인터뷰에서 화를 말로 표출할 수 있는 마지노선을 보여준다. “××새끼, ×밥, 개저씨, 개소리, 개사이코, 개××, 양아치, 구라.” “내가 너네처럼 술처마시냐, 골프를 치냐?” “들어올라면 맞다이로 들어와.” 배 속에서, 창자 속에서 뱉어낸 직설적이며 적나라한 상말을 구사한다. 청중은 화들짝 놀라다가도 어딘가 익숙한 표현에 실소를 터트린다. 이건 전통사회에서 말뚝이가 양반을 비웃고 풍자할 때 쓰던 상말이다. ×자리, ×대갱이, ×반과 같은 음사(淫辭)가 대표적이다. 또한 상대방을 비하하기 위해 후루 개자식, 개아들놈, 옛끼놈, 타마개(똥개) 자슥들, 도야지 새끼, 실배암 새끼 등 다양한 동물 비유를 활용한다. 상말을 통해 억울한 자의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면서도 억압자에 대한 저항과 반항을 드러낸다.

문제는 전통적으로 말뚝이는 남자였다는 사실. 그런데 감정 조절도 못해 골방에서 찡찡되고 훌쩍거리는 어린아이 정도로 무시당하던 여자가 바야흐로 공적 영역에 말뚝이로 출현했다! 성공한 CEO 남성의 허위를 온갖 상말을 동원해 풍자하며 남성 중심의 감정 규칙을 교란하는 아이러니스트! 이 풍자적 공연이 인지적 진위를 다투는 법정 공방으로 넘어가면 여자 말뚝이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야류·오광대의 ‘할미’처럼 결국 영감에게 맞아죽을 것인가? 아니나다를까, 법물신주의에 빠진 언론의 견제가 벌써부터 시작되었다. 과유불급, 잘잘못은 법이 가려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싸움이 경영권 분쟁을 넘어 한국사회의 젠더화된 감정 규칙의 획기적인 분기점이 될지도 모르니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이다.

최종렬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

최종렬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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