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광야에 선 ‘진보정치’

손호철 서강대 정치학과 명예교수

‘미국 예외주의.’ 미국정치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구다. 사회민주주의·사회주의 대 자유주의라는 ‘진보’ 대 ‘보수’의 대립구도를 가지고 있는 대다수 선진국과 달리 ‘진보정당’이 존재하지 않고 ‘보수양당’이 경쟁하는 미국의 특이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정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의미 있는 진보정당의 부재’라는 ‘한국 예외주의’다.

이에 대해 일부는, 아니 대다수 언론 등은 “이 땅에는 1950년대 민주당으로부터 더불어민주당으로 이어져온 강력한 ‘진보야당’이 있는데 무슨 헛소리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아니 일부 극우세력은 민주당이 ‘진보정당’을 넘어 친북 ‘빨갱이 정당’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진보·보수’를 단순히 상대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미국의 민주당과 더불어민주당은 공화당이나 국민의힘보다 ‘진보’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상대주의는 히틀러에 비해 덜 극우라는 이유로 무솔리니를 ‘진보’라고 주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올바른 기준은 자본주의와 시장에 대한 태도로, 이를 지지하면 보수, 비판적이면 진보다. 다시 말해,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등이 진보(프로그래시브)이고, 미국의 민주당과 더불어민주당은 좁은 의미의 보수(컨서버티브)는 아니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보수’의 일부인 ‘자유주의’(리버럴)정당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만으로는 부족하다. 2007년 대선에서 한 유명 페미니스트가 박근혜를 지지해 논쟁이 됐다. 페미니즘 입장에서는 가장 진보적인 남성후보보다 가장 보수적인 여성후보가 더 진보적이라는 주장이었다. ‘21세기의 진보’란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가 중심에 있지만 여성, 생태, 소수자 등의 문제에 대한 태도가 결합한 것으로 그런 의미에서 의미 있는 ‘진보정당’은 이 땅에 없다.

한국의 진보정당은 세 시기를 통해 발전해 왔다.

제1기는 일제에서 해방정국으로 이어진 시기로 일제와 봉건적 수탈에 저항했던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등의 흐름이다. 이는 한국전쟁과 이승만 독재에 의해 압살됐다.

제2기는 1950년대 후반 조봉암이 이끈 진보당 실험에 기반해 1960년 4·19혁명 뒤 폭발적으로 생겨난 진보정당들이다. 이들은 7% 정도의 지지를 얻고 7명이 국회에 진출했지만 5·16 쿠데타에 의해 또다시 압살됐다.

제3기는 1987년 민주화 이후로 1960~1970년대 산업화의 결과로 성장한 노동자계급 등에 기초한 민주노동당의 실험이다. 이는 10석의 ‘강소정당’으로 자리 잡지만 반미자주화와 통일문제를 중시하는 ‘자주파’와 사회적 양극화 등 우리의 ‘내부모순’을 중시하는 ‘평등파’의 갈등 등으로 괴멸하고 말았다. 이후 평등파를 대표하는 노회찬, 심상정과 자주파 ‘온건세력’이 손을 잡고 정의당을 만들었고 이는 2020년 총선에서 9.67%의 지지율을 얻었다. 하지만 조국사태에 대한 침묵과 도덕적 추락 등으로 위기에 처했다(이에 대해서는 이 지면 2022년 4월19일자에 쓴 칼럼 ‘정의당은 어디로’ 참조). 설상가상으로 윤석열 대통령의 오만과 독선으로 철 지난 ‘민주 대 반민주 구도’의 변형인 윤 정권 심판론이 급부상하고 총선이 기후위기 등 정책경쟁이 사라진 최악의 선거로 변하면서 정의당은 참패하고 말았다. 2004년 5·16 쿠데타 이후 40여년 만에 어렵게 원내 진출한 진보정당이 다시 20년 만에 광야로 내몰린 것이다. 자주파가 만든 진보당은 원내 진출했지만 이는 민주당의 ‘위성정당’ 참여 등을 통해 이룬 것으로 ‘독자적 진보정당’ 운동이라고 보기 어렵다.

확실할 것은 이번 총선으로 제3기 진보정당운동은 끝났고 제4기 진보정치운동, 21세기 진보정당은 낡은 자주파·평등파 논쟁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당이 제4기의 시작인 줄 알았지만 ‘제3기의 끝물’이었던 것 같다. 정의당의 실험은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의당이 추구한 길, 즉 노동(적)·생태(녹)·여성(보라)이라는 ‘적녹보’연합, 아니 모든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끌어안는 ‘무지개연합’이 21세기 한국 진보정당, 제4기 진보정당이 나아가야 할 길임은 확실하다.

문제는 비판적인 이성이 사라진 포퓰리즘과 팬덤정치 시대에 어떻게 진보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새롭게 구성해낼 것이냐 하는 지난한 과제다. 신좌파의 효시인 안토니오 그람시는 위기를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태어나지 않은 상황”이라고 정의했다.

그렇다. 낡은 진보정당은 죽어가는데, 아니 죽었지만, 새로운 진보정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손호철 서강대 정치학과 명예교수

손호철 서강대 정치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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