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키우는 사람들

허남설 기자

(5)우리 동네 그린 디벨로퍼

서울 동북쪽 끄트머리에 백사마을이란 동네가 있다. 1960~1970년대 서울시는 남대문, 용산, 청계천 등지에 빼곡했던 무허가 주택을 철거한 다음 철거민을 트럭에 실어 백사마을 같은 변두리로 날랐다. 이 마을엔 아직 선대의 이주 서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 수백 채 가옥은 군사정권 시절 판자촌 개량 사업을 벌일 때 썼던 붉은 시멘트 기와, 회색 시멘트 블록투성이다. 여기는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의 ‘흙수저’ 윤현우, 그의 엄마가 국밥을 팔던 ‘삼거리식당’은 실제 이 마을에 있는 밥집이다.

재개발로 현재는 주민이 거의 떠난 서울 노원구 백사마을의 지난여름 풍경. 사람이 사는 집과 그렇지 않은 집을 가르는 뚜렷한 표지가 있다. 바로 ‘화분’이다.

재개발로 현재는 주민이 거의 떠난 서울 노원구 백사마을의 지난여름 풍경. 사람이 사는 집과 그렇지 않은 집을 가르는 뚜렷한 표지가 있다. 바로 ‘화분’이다.

백사마을에는 현재 주민이 거의 없다. 재개발 인허가가 최종 문턱을 넘을 듯해 보였던 2~3년 전부터 떠나는 사람이 급격히 늘었다. 지금은 거의 ‘유령 마을’에 가깝다. 무슨 포부였는지 건축가 10명이 싹 밀고 다시 짓는 ‘K재개발’ 대신 새로운 재개발을 시도해보려다가 크게 좌절했다. 백사마을도 곧 ‘K아파트’가 될 운명을 기다린다.

모든 재개발 현장은 이권과 이견으로 시끄럽다. 2020년부터 거의 철이 바뀔 때마다 한 번씩 마을을 찾았다. 언제나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권과 이견을 이야기하는 주민들이 있었다. 지난여름, 마지막으로 들렀을 땐 그마저도 없었다. 몇 집밖에 남지 않은 마을은 휑하기 그지없었고, 빈집에서 주인 행세를 하는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스산했다. 그때 경계심을 바짝 세우고 인기척 없는 골목을 걸으면서 하나 깨달았다. 사람이 사는 집과 그렇지 않은 집을 가르는 뚜렷한 표지가 있다는 것을. 그것은 ‘화분’이었다.

‘K재개발’ 앞둔 백사마을
잦아든 인기척 대신하는
화분들 속 초록빛이 신선
언제 뽑힐지 모를 삶에서
공간 정체성은 어려운 얘기
몰개성 ‘아파트 공화국’ 속
‘게릴라 가드닝’을 상상하다

백사마을에는 원래 푸성귀가 많았다. 동네 어귀마다 고추, 오이, 상추를 볼 수 있었다. 작물은 제대로 다진 텃밭뿐만 아니라 시멘트 바닥을 깨부수고 드러낸 흙마당에서, 플라스틱 그릇에서, 어디선가 주워왔을 스티로폼 박스에서 자랐다. 화초도 제법 흔했다. 전에는 무심코 지나친 것들이, 사람이 떠난 적적한 마을에선 묘하게 위안을 주었다. 빗질이라도 해주고 싶을 만큼 꼬인 넝쿨, 단단한 합성수지를 깨고 나온 뿌리, 쓰레기 더미와 얽히고설킨 이파리는 언제나 붉은 스프레이로 써댄 ‘공가’ ‘철거’ 따위의 글자와 함께였다. 사람의 손이 닿은 식물과 그렇지 않은 식물이 풍기는 기운은 무척 달랐다.

취재 중 우연히 만난 화분 가득한 집.

취재 중 우연히 만난 화분 가득한 집.

그런 마을의 골목을 헤매다가 우연히 만난 집. 주인아주머니는 집 앞을 가득 채운 화분에 물을 주고 계셨다. 무릎 높이로 친 울타리 안쪽엔 화초가 쏟아질 듯 가득했는데, 거기엔 키와 색을 고려한 위계와 배합이 나타났다. 아주머니는 발육과 발화를 관찰하며 수십 번은 화분을 이리저리 옮겼을 터다. 아마 어제도 물을 주셨을 거고, 내일도 물을 주실 거다. 재개발한다니 우르르 떠버린 동네에서 만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예쁜 파사드(facade·건물의 정면을 뜻하는 건축용어)였다.

백사마을 사람들만 유독 이럴 리가 없다. 오래된 동네 어디를 가든 화초를 정성스레 가꾼 장소를 꼭 만난다. 여기서 ‘오래된’은 되게 중요하다. 웬만한 시간으로는 짙은 녹음이 나오지 않는다. 예사롭지 않은 푸르름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주로 백사마을 같은 오래된 동네다. 그런 곳에는 으레 자신만의 정원, 농장을 꾸며온 사람들이 있다. ‘식집사’는 사실 새롭지 않은 말이다.

‘그린 라이프스타일 디벨로퍼’를 표방하는 서울가드닝클럽이란 디자인 스튜디오가 있다. 식물과 정원에 기반한 공간을 만들고 관련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노들섬, 서울역7017, 서울숲 등 공공프로젝트에도 많이 참여했다. 서울가드닝클럽은 ‘가드닝(gardening)’의 의미를 세 가지로 정리했다. ① 자연과 연결되는 참된 노동 ② 자신의 정체성을 도시와 공간에 표현하는 작업 ③ 도시의 환경과 공동체에 미치는 선한 영향력. 정말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정의다. 이 중 ①과 ③은 이미 많은 식집사가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먼저 ①. 우리 집 스파티필룸은 며칠만 집을 비워도 잎이 맥을 못 추고 측은하게 축 늘어진다. 놀란 마음에 후다닥 물을 주면 한두 시간 만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고개를 드는데, 그럴 때면 얘는 ‘관종’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냥 공기정화에 좋다기에 들였는데, 이 생명체가 관심을 요구하니 뭔가 응해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봤자 스파티필룸은 초보용 식물이고, 백사마을 아주머니처럼 한가득 키우는 가드너에겐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키 낮은 식물을 돌보기 위한 쪼그렸다 일어나기의 반복은 흡사 스쾃이어서 자꾸 하면 엉덩이와 허벅지가 탄탄해진다. 정서적 안정감은 덤이다.

그리고 ③. 식물의 녹색은 확실히 콘크리트의 회색보다 도시 미관에 더 크게 기여한다. 골목과 거리를 향한 개인의 가드닝은 결국 난 이 공용 공간에 일정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신호다. ‘선한 영향력’이란 표현은 그래서 아주 적합하다. 기후변화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식물을 키우면 우리의 관심이 확장된다. 집에서 동네로, 도시로, 나아가서 지구로. 마트에서 산 페트통에 담긴 채소가 어디서 왔는지 새삼 궁금해하거나, 잎사귀 하나하나가 흡수하는 탄소의 중립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반면 ②는 우리가 잘 듣지 못하는 이야기다. 왜일까? 아파트 때문이다. 2가구 중 1가구는 아파트에 산다. 일단 그 아파트가 정체성이 없어서 그 안에서 가드닝을 해봤자 식집사의 정체성이 도시에 표현될 리가 만무하다. 테라스는 고사하고, 그나마 외기와 맞닿는 ‘베란다(실제로는 발코니가 맞는 말이다.)’마저 한 평이라도 더 분양하려고 기를 쓰는 시장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아파트 공화국에서는 종종 이런 일을 목격할 수 있다. 서울의 아파트란 대개 백사마을 같은 동네를 재개발해 만든 곳이어서, 옛날 습성을 버리지 못한 주민이 꽤 살고 있다. 이런 분들은 가끔 아파트 화단에 꽃씨를 뿌리거나 심지어 경작해 대파를 재배한다. 경악하는 다른 주민들을 향해 되레 “잡초나 자라는 땅을 놀려서 뭐 하느냐”고 대거리하는 광경도 봤다. 아파트 단지는 바깥에서 볼 때는 주민의 사유지, 단지 안에서 볼 때는 주민의 공유지다. 그런데 실제 쓰임새는 사유지도, 공유지도 아니다. 그냥 아무도 손대지 못한다. 역시 정체성을 표현할 공간이 못 된다.

‘공덕동 식물유치원’ 원장 백수혜는 재개발 단지에 버려진 식물을 ‘구조’한다. 그는 아파트가 되기 직전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우리가 어느새 잊어버린 이야기,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정체성을 상상한다.

“저 집 담장 안의 커다란 대추나무는 혹시 자녀의 탄생을 기념하며 심었을까? 감나무가 있는 저 집은 가을에 고운 주황빛으로 익었을 감들은 기다란 장대로 땄을까? 화분이 많은 이 집은 주인이 식물을 엄청 좋아했나 보다. 능소화로 뒤덮인 담벼락은 여느 벽화보다 아름답고, 장미 덩굴이 장악한 담벼락이 길게 늘어선 골목에선 바람이 불 때마다 짙은 꽃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여기는 ‘공덕동 식물유치원’입니다>, 세미콜론)

허남설 기자

허남설 기자

백수혜의 식물유치원도 언제 재개발할지 모르는 오래된 동네에 있다. 그는 그곳의 앞날을 걱정하며 방아, 고추, 채송화, 라일락, 모란과 골목에서 스친 이웃의 얼굴을 겹쳐 그린다. 화끈한 K재개발은 화초든 사람이든 뿌리를 송두리째 뽑고 말 테니까. 그렇게 만든 장소에 우리가 정체성을 이야기할 공간 따위는 없을 테니.

공유지를 ‘습격’해 꽃밭·텃밭을 조성하는 ‘게릴라 가드닝’이란 세계적 운동이 있다. ‘적화’가 아닌 ‘녹화’를 목표로 삼아 게릴라전을 펼치는 이 운동의 전략가, 리처드 레이놀즈는 “도시를 개성 있게 만드는 소소한 디테일은 경제와 조경이 세계화를 표방하면서 마음대로 규칙과 행동 양식을 정하는 바람에 사라져버렸다”(<게릴라 가드닝>, 들녘)고 한탄했다. 영국에서 타전한 프로파간다가 어째 우리에게 꼭 들어맞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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