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예산 편성 작업을 진행중인 기획재정부가 지난해 연구·개발(R&D) 예산 규모를 두고 말을 바꾸고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2023년도 R&D 예산을 31조1000억원으로 집계했다가 최근 들어 29조3000억원으로 정정했다. 기재부는 올해 예산안을 지난해 9월 국회에 제출하기 전부터 새 기준을 적용했다고 밝혔지만, 예산안 국회 통과 직후인 지난해 12월에도 2023년도 R&D 예산 규모를 31조1000억원으로 공식 발표한 것으로 확인됐다. 기재부는 예산안을 편성할 때와 예산안끼리 비교할 때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고 해명했지만, 정부가 입맛대로 R&D 예산 수치를 바꾸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재부는 지난 22일 보도설명자료를 통해 “내년도 R&D 예산은 시스템 개혁과 함께 2023년 29조3000억원 대비 확대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2023년 R&D 예산 규모는 31조1000억원이라던 기존 발표를 뒤집은 것이다.
기재부는 ‘R&D 예산을 대폭 인상하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내년도 예산안을 편성하고 있다. 기재부가 편성 중인 내년도 R&D 예산은 역대 최대 규모였던 2023년의 31조1000억원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이런 민감한 시기에 R&D 기준을 재분류했다고 거듭 밝힌 것이다.
기재부는 2024년도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하기 전인 지난해 이미 R&D 예산안 분류 기준을 바꿨다고 설명했다. 기재부는 “2024년 R&D 예산 편성 과정에서 기존 2023년 R&D 31조1000억원 중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권고기준상 R&D로 분류하지 않는 대학 일반지원 성격 사업 등 1조8000억원을 비R&D로 재분류했다”며 “2024년 예산안 편성시 1조8000억원 이관분을 제외한 2023년 R&D 29조3000억원을 토대로 최종 2024년 R&D 26조5000억원(전년 대비 -2조8000억원)을 편성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기재부가 2024년도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을 때는 지난해 9월이다. 기재부 논리대로라면 최소한 예산안 편성 당시인 지난해 9월 이전부터 2023년도 R&D 예산안 수치는 31조1000억원이 아닌 29조3000억원으로 수정됐어야 한다. 그런데도 기재부는 예산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지난해 12월21일 공식 보도자료에서 2023년 R&D 예산을 31조1000억원으로 집계했다.
기재부는 해를 넘겨 지난 2월 발표한 ‘2024년 나라살림 예산 개요’라는 자료에서도 2023년 R&D 예산안을 31조1000억원으로 명시했다. 삭감 폭은 “14.6%”로 계산했다. 다만 같은 자료에 있는 ‘정부 R&D 투자 추이’ 그래프에서는 2023년 R&D 예산을 29조3000억원으로 제시했다. 삭감 폭은 “9.5% 감소”했다고 적었다. 같은 자료에서도 오락가락 통계를 혼재한 것이다.
기재부가 2023년도 R&D 예산 규모에서 1조8000억원을 뺀 것은 내년도 R&D 예산 편성을 앞둔 상황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 윤 대통령은 지난 17일 그간의 R&D 삭감 기조를 바꿔 R&D 예비타당성 조사 폐지와 투자 규모 대폭 확충을 지시했다. 기재부는 역대급 세수 펑크로 재정 여력이 크지 않아 R&D 예산을 대폭 확충하기 어려운 처지다. 기재부가 2023년 R&D 예산 규모를 31조1000억원이 아닌 29조3000억원으로 집계하면, 정부가 대폭 삭감한 R&D 원상회복을 위한 증액 기준도 4조6000억원에서 2조8000억원으로 줄어든다.
기재부 측은 예산안을 편성할 때와 정부가 통계를 낼 때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예산을 편성할 때는 모수를 조정해 1조8000억원을 덜어낸 29조3000억원을 기준으로 이듬해 예산을 편성했으나, 연도별 예산안끼리 비교할 때는 (이미 국회에서 확정된 31조1000억원의 수치를 변경할 수 없어서) 31조1000억원이 된다”고 설명했다. 손종필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R&D 예산 수치를 갑자기 바꾸면 국민에게 혼란만 준다”며 “기재부 입맛대로 R&D 예산 기준 잣대를 만든 것 같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