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여행에서 만난 한 아버지는 두 아이의 학비를 마련하지 못할까 늘 걱정한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초등, 중등교육이 무료인데 필리핀도 그렇게 되면 좋지 않겠냐고 묻자 그는 ‘교육은 국가의 일이 아니다. 아이들의 학비를 대는 것은 아버지의 고유한 자부심’이라며 정색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또 한 사람이 생각났다. 꽤 오래전 다른 여행에서 만난 덴마크인이었는데, 그는 대학 때 파업을 벌인 적이 있다고 했다. 학비가 없고 대학생에게 생활비도 지급하는 덴마크에서 일어난 학생 파업의 이유는 학교 당국이 수업에 필요한 교재 비용을 부과하려 해서였다. 책은 네 것인데 네가 구입하는 게 맞지 않냐고 묻자 그는 ‘수업을 듣는데 꼭 필요한 것이라면 수업의 일부’라고 답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일까 골몰하지만 사실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지가 우리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것은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한 사회의 규율은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데다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상상하기란 꽤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지만, 어쩌면 세상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생각을 바꿀 필요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학비에 대한 필리핀 사람의 생각은 집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생각과 닮았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집값은 아무리 부담스럽더라도 각자 부담해야 하는 것으로, 집은 사회적 자원이라기보다 개인과 가족의 사유재산으로만 취급된다. 주거권은 기본권 중 하나라는데 왜 집을 얻기란 이토록 어렵고 힘든가 의문이 들지만, 그 생각을 더 멀리 밀어붙이긴 어렵다. 집을 둘러싼 수많은 이해관계와 경험이 우리를 에워싼 탓에 이를 떠나 집 문제를 떠올리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주택 문제에 정부가 개입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만약 소수가 집을 소유하고, 이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추구한다면 이는 동시대 다른 사람들에게 부담을 지우기 때문이다. 이를 관리하는 것은 국가의 중요한 책임이자 의무다.
한국의 집은 그런 점에서 실패했다. 최대의 복리를 추구하기 위한 개인들의 선택이 사회적으로는 위험하거나 실패한 결과를 낳게끔 조직되어 있다. 수천 채의 집을 구입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추구해도 되고, 투자에 실패하더라도 그 비용이 세입자에게 전가되게끔 조직된 구조가 이를 보여준다. 정부·여당이 이를 외면한 채 전세사기 피해를 ‘사인 간의 일’로 치부하면 할수록 이 땅은 더 깊은 지옥이 된다. 세입자를 전세사기, 깡통전세의 먹잇감으로 방치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나은 사회에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집을 둘러싼 우리의 관계를 더 나은 것이 될 수 있도록 이제 ‘사회’가 바뀔 때다. 세입자의 보증금은 당연히 안전하게 보호받아야 하는 것으로 현실부터 바꾸자.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에 정부가 나설 때 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