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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 구현을 위한 차별과 불평등

입력 2024.05.28 20:36

수정 2024.05.28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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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조세재정연구원(조세연)이 최근 현행 누진세 제도만으로는 양극화 해소에 한계가 있으니 1인1표 선거 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다. 젊은층 또는 저소득층에 더 많은 투표권을 주는 ‘차등투표제’를 제시했다. 가난한 사람과 미래 세대 등 사회적 소수에게 정책결정 권한을 더 주는 게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시민 투표권은 프랑스의 1789년 헌법에 처음 등장했다. 프랑스 혁명 결과로 만들어진 이 헌법의 참정권은 1인1표이기는 했지만 차등선거였다. 유권자를 25세 이상이면서 일정한 재산을 소유하고 세금을 납부하는 이른바 ‘능동 시민’으로 제한했다.

이후 뉴질랜드가 1893년에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고, 영국과 미국은 각각 1918년, 1920년 여성 참정권을 법으로 인정했다. 프랑스에서 여성이 투표권을 갖게 된 것은 헌법 제정 후 150여년이 지난 1944년이었다. 한국은 1948년 제헌 헌법에서 남녀의 평등한 참정권을 보장했는데, 실제 여성이 투표권을 행사한 것은 1952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부터였다.

현대 민주주의 시스템에서 선거의 4대 원칙은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이다. 이 가운데 평등은 시민의 투표가치를 평등하게 취급해 모든 유권자가 1인1표의 투표권을 갖는다는 원칙이다.

투표권을 차등화하자는 움직임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김은경 더불어민주당 혁신위원장은 남은 기대수명에 따라 표에 대한 권리를 차등하는 ‘여명비례투표제’가 합리적일 수 있다고 했다가 노인 폄훼와 차별이라는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여명비례대표제와 달리 조세연의 차등투표제에 대해선 생각보다 큰 논란이 발생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기본 질서를 무너뜨리는 발상이라며 노인들이 발끈하고 나설 만하다. 보수 성향의 언론사 기사에는 “미친 소리” “좌파의 헛소리” 등 비난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다만 차등의 취지가 분배 정의 실현과 불평등 완화에 있다는 측면에서 고려해볼 만한 아이디어라는 반응이 나온다. 보고서를 작성한 이는 조세연에서 32년간 근무한 뒤 퇴직한 홍범교 명예선임연구위원이다. 국책연구기관 소속이라는 한계 탓에 재직 중 드러내지 못했던 소신을 마지막에 펼친 것 같다. 홍 연구위원은 고소득층으로부터 세금을 더 많이 거둬 취약계층을 지원해야 양극화를 해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부자 증세가 필요하다. 누진세제를 강화하거나 부유세, 횡재세 등을 신설해야 한다. 그러나 자본이 곧 권력인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취약계층 뜻대로 정치적 결정이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소수인 젊은이와 저소득층에 더 많은 투표권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홍 연구위원은 정치철학자 존 롤스의 ‘차등원칙’을 빌려 “사회구성원 가운데 어려운 사람에게 유리한 불평등이 바람직한 불평등”이라고 소개한다.

김지혜 강릉원주대 교수는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실질적으로 평등을 구현하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불평등의 대물림을 끊는 재분배 정책도 필요하고,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낙인과도 싸워야 하며, 개인들의 다양성을 고려한 제도를 만드는 등 다른 조치들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다른 조치’에 ‘차등투표제’가 포함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일견 조세연 보고서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

평등을 구현하기 위한 차별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지하철의 노약자나 임산부 보호석, 노인이나 장애인에게 지급하는 연금 등이 그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미 어려운 사람에게 유리한 선한 차별을 만들고 있다. 투표 차등제 발상도 사회적 소수에 유리한 차별의 일환이다. 차별 대신 우대라고 칭해도 좋다. 투표 차등제 구상은 평등을 향해 민주주의가 진일보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마이너 필링스>는 이민자 2세대인 캐시 박홍 미국 UC버클리대 교수가 겪은 차별과 감정을 담아낸 자전적 에세이다. 박홍 교수는 책에서 “우리가 살면서 겪는 구조적 차별은 그들이 착각하는 현실과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에 우리의 감정은 과잉반응”이라고 했다. 차별을 가하는 입장, 즉 다수자 또는 결정 위치에 있는 이들은 차별당하는 사람들의 느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김 교수와 박홍 교수가 다음달 26일 열리는 <2024 경향포럼>에서 ‘다양성이 민주주의 희망’이라는 주제로 대담을 나눈다. 선한 차별과 다양성, 포용, 민주주의의 가치를 일깨울 두 사람의 만남을 기대한다.

안호기 사회경제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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