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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회는 역(役)의 체계

입력 2024.06.05 20:38

수정 2024.06.05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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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칼럼(5월9일자)에서 일본 사람들이 각자 맡은 ‘야쿠’(役·역할)를 수행하며 때로는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는 ‘1억 총연극의 사회’에 대해 썼는데, 흥미롭게 여기는 분들이 제법 있어 부연설명하려고 한다. 야쿠를 역할로 번역했지만, 딱 들어맞는 느낌은 아니다. 역할보다는 좀 더 분명하고 엄격하다. 유학 시절 식당에 갔는데 일본인 종업원이 쟁반에 반찬을 올려 서빙을 해줬다. 한국에서의 습관이 남아 있던 나는 반찬 그릇 옮기는 걸 도와주려고 손을 뻗었다. 한국에서는 아주머니가 “학생, 이것 좀 거기다 놔줘요~”라고 하기도 하지 않나(요즘도 한국에 이런 풍경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자 아직 앳된 그는 흠칫 놀라며 “스미마센!”(죄송합니다)을 연발했다. 서빙이라는 자기의 야쿠에 손님이 개입한 데 놀랐던 것이고, 자신의 야쿠 수행에 무슨 큰 결함이라도 있었나 하고 생각한 것이다. 사장이나 종업원이 바쁜 듯하면 냉장고 안에 있는 맥주를 알아서 꺼내오는 한국인 손님을 그가 상상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일본사상사가 비토 마사히데는 이런 일본 사회의 특질을 ‘역(役)의 체계’라고 이름 짓고, 이는 도쿠가와 시대에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에도시대란 무엇인가> <일본문화의 역사>). 약 400년 전 형성된 이런 특질이 근대화라는 큰 변화에도 아직까지 일본 사회를 강하게 구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무라이·농민·상인·수공업자 같은 사회계층, 그리고 그 계층을 이루는 다양한 직업군 등 모든 사회 구성원이 이에(家)를 단위로 하여 각자의 야쿠를 수행하는 체제다. 야쿠의 수행 주체로서 ‘이에의 일반적 성립’이 도쿠가와 시대에 달성되고, ‘역의 체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체제하에서 개인은 이에라는 집단에 강하게 수렴되는 존재에 불과하다.

각자가 야쿠를 지키며 ‘본분’을 다할 때 사회는 조화롭게 운영된다. 타인의 야쿠는 그게 천한 직업일지라도 인정받고 존중된다. 그런 면에서 일본은 한국보다 훨씬 직업의 귀천이 없는 사회다. 반면 야쿠가 침범될 땐 강력한 저항이 발생하며 그것은 일종의 정당방위로 간주된다. 그런데 비토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본 사회의 이런 야쿠에 자발적이며 평등한 요소가 있다고 주장한다. 각 집단 혹은 이에는 차별적인 일에 종사하지만 그 일이 전체 사회에서 갖는 기능, 즉 야쿠는 최고권력자라도 무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평등하다는 것이다. 이를 조금 과장해 도식화하면 일본 사회는 수많은 상자가 층차적(層次的)으로 쌓인 모습이다. 각 상자 사이에 우열이나 서열은 물론 있지만 옆이나 위에 있는 상자라 할지라도 쉽게 다른 상자에 간여할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이런 ‘상자구조’의 사회는 장단점이 있다. 각자의 영역을 비교적 존중하는 풍토에서 사회는 분권적으로 운영된다. 문자 그대로의 절대군주는 현실에선 없다. 한국처럼 정권이 바뀌면 대학교수 연구비 배분에까지 변화가 생기거나, 최고경영자(CEO)가 톱다운 방식으로 큰 결정을 해서 기업 운명이 좌우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각 세력은 나름의 ‘나와바리’(縄張り·선을 그은 영역, 이 단어야말로 일본 사회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말이다)를 갖고 있고, 아무리 권력이 바뀌어도 이 영역까지 침범하는 일은 거의 없다. ‘혁명은 없다!’

비토는 이런 특질을 ‘분권적=민주적’이라고 해석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의 지적 라이벌이었던 마루야마 마사오는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영역에만 몰두하는 습성이 결국 ‘무책임의 체계’를 만들어 태평양전쟁으로 돌진했고, 패전 후에도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 모르는 황당한 상황을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야쿠를 성실히 수행하는 건 좋다. 그러나 침략전쟁은 군인이나 정치가의 야쿠이니 나랑은 상관없다고 한다면, 민주시민으로서는 결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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