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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에 머무는 기억

입력 2024.06.05 20:49

학교 축제에 가수 ‘뉴진스’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들뜬 마음으로 졸업한 동기들을 불러 모았다. 나는 학부를 졸업한 대학교에서 대학원을 다녔고, 이제는 여기에서 강의를 한다. 그러니까 스무 살부터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같은 캠퍼스를 수없이 오간 셈이다. 친구들은 이렇게 오랜 시간 한 장소에 매여 사는 나를 ‘지박령’이라고 놀리곤 한다.

오랜만에 학교를 찾은 동기들은 이곳저곳을 둘러보고는 새삼 옛 기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나는 머무르는 사람이라 그런 걸까? 익숙한 교정을 거닐 때 딱히 새로운 기억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저 얇은 반죽이 겹겹이 쌓인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캠퍼스의 공간마다 여러 기억이 층층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원래 뭐가 있었더라?” 묻는 친구에게 “계단이 있었는데 에스컬레이터가 생겼지”라고 큰 감흥 없이 대답해 주었다. “여기서 우리 밤샘 공부하고 컵라면 먹었잖아, 여기가 우리 넷이 처음 후배들 밥 사준 곳이고.” 내가 덤덤히 일러줄 때마다 친구들은 감탄했다. “어떻게 다 기억해?” “나야 뭐, 항상 여기에 있으니까.” 건조하게 말했지만, 아마 나는 동기들이 떠난 공간에 남은 기억을 홀로 가꾸고 있었나 보다. 우리가 아는 벤치와 식당, 굴곡진 길과 언덕의 벚나무를 마주할 때마다 추억을 되새기면서 지워지지 않도록 덧칠했던 것 같다. 이 장소에 머무는 기억과 한 번도 헤어진 적이 없기 때문에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 같은 게 없었던 셈이다.

공간에 스미는 기억이란 무엇일까? 내가 새내기였을 때, 몇몇 교수님께서는 이 학교에 커다란 교문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셨다. 나른한 오후에 강의실에 앉아 그 이야기를 들을 때면 늘 의아했다. 사라진 교문이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특별한 상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아주 중요한 일처럼 언급하시는 걸까, 항상 궁금했었다. 10여년이 지난 후에야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나는 요즘, 학생들 앞에 설 때마다 백주년 기념관이 들어서기 전에는 후문에 커다란 운동장이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지금은 정문의 잔디밭에 축제 무대를 설치하지만, 이전에는 운동장에 모여 앉아 축제를 즐겼었다고, 거기에서 축구도 하고 친한 선배와 줄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눠 끼고서 산책도 했다고 떠들고 싶다. 같은 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에게는 그 공간의 변화가 압도적인 지각변동처럼 체감된다. 허물어진 교문이나 사라진 운동장 여기저기에 매달려 있던 기억들이 철거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터전을 잃고 어딘가에서 부유하고 있을, 미래로 날아들 기회를 잃은 기억들은 어디쯤에서 배회하고 있을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교문의 사진을 찾아보니 기와지붕이 덮인 독특한 외양을 하고 있다. 가히 잊기 어려운 모양이다.

축제 입장 줄은 너무나 길었고 인파에 가로막혀 기대했던 가수의 무대는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덕분에 간직해 온 달콤한 기억의 조각들을 친구들에게 잔뜩 나누어 줄 수 있었다.

친구들이 모두 돌아간 다음날 수업을 위해 학교에 출근하며, 나는 남겨진 자의 쓸쓸함을 생각했다. 몇주 뒤면 종강을 하게 될 것이고, 매주 마주 보던 학생들도 나를 떠나갈 것이다. 우연한 마주침을 기대하며 나는 또 홀로 남아 이곳을 맴돌 테지. 그렇다면 이 공간에는 무수한 이별만이 쌓여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심란했다. 그러다 이내 이곳이 숱한 만남이 서린 장소이자 재회를 예비하는 공간이기도 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의도치 않게 기억력이 비상해진 나는 언젠가 돌아온 이들에게 잘 보관한 추억을 하나씩 불어넣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몽글몽글한 솜사탕을 오늘치의 구름인 양 나눠주는 사람처럼. 오래 그리워한 사람 특유의 차분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당신과 함께 만든 계절의 구름이에요, 말하면서.

성현아 문학평론가

성현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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