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스승은 있다. 그 스승은 학교 선생님이나 직장 상사 혹은 가족 구성원일 수도 있다. 혹자는, 요즘은 스승이 사라진 시대라고 한다. 필요한 지식이야 유튜브나 인공지능을 통해 언제든지 얻을 수 있고, 지혜를 지닌 본받을 만한 대상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멘토’니 ‘구루’니 하는 생경한 단어를 끌어다 자신이 닮고자 하는 모습을 비춰보기도 한다. 하긴 자신의 삶에 영감과 통찰을 줄 수 있다면 이름이 무엇이든 대상이 누구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스승을 만나기 어려운 시대에 어쩌면 스승을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이다.
특히 출가 수행자에게 스승과의 인연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특별하다. 세속의 인연을 끊고 출가했다고는 하나 때로는 혈육 이상의 정서적 교감을 느끼기도 한다. 내게도 그런 스승이 있었지만, 지난주 열반에 드셨다. 마치 촛불이 꺼지듯 노스님의 임종 순간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노스님은 생전에도 그렇게 부지런하셨는데, 뭐가 그리 급한지 이른 새벽 동도 트기 전에 떠나가셨다.
노스님은 불자들이 흔히 말하는 선사도, 대강백(大講伯·경론의 큰 스승)도 아니었다. 평생을 마치 절집 부목처럼 그저 쉴 새 없이 일하고 또 일하는 것을 수행으로 삼으셨다. 노스님은 10대의 나이에 출가해서 67년 동안 가야산에서 수행하고 해인사뿐만 아니라 가야산 산림과 크고 작은 암자들을 지켜내며 평생을 살아오셨다. 그럴싸한 소임은 마다하고 궂은 일을 찾아서 하시면서 오직 대중 스님들 시봉하는 일에만 묵묵히 진력하셨다. 출가해서 노스님께 처음 법명을 받고 기뻐서 뜻을 되묻고 되물었던 적이 있다. 그럴 때마다 ‘별 싱거운 놈 다 보겠다’고 혼을 냈으나 따뜻한 속정을 느낄 수 있었다. 노스님께서는 오래전부터 해마다 설날이 되면 가야산 곳곳에 있는 모든 암자를 일일이 빼놓지 않고 돌면서 부처님 앞에 가서 직접 세배 드리기를 빼놓지 않으셨다. 산길 눈밭을 헤쳐가면서 노구를 이끌고 차가운 법당 혹은 바위 위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던 노스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특히 노스님은 근현대 한국불교 큰스님들이 열반하시면 그 다비식을 손수 거들어 다비(茶毘)작법 전승자로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주지 스님을 비롯한 산중 어른 스님들은 노스님만큼은 반드시 전통 방식의 다비식으로 보내드려야 한다고 하셨다. 하안거 중임에도 많은 대중 스님이 잠시 참선 정진을 멈추고 각자의 기억과 인연 속에 노스님 가는 길을 배웅하려 조문을 오셨다.
전통식으로 봉행된 다비식은 그 자체가 노스님의 마지막 법문이었다. 노스님의 법구가 잿더미가 될 때까지 필요한 것은 간간이 불어오는 봄바람과 상수리나무, 소나무 토막 더미가 전부였다. 오전에 시작된 다비는 밤을 지나 하루를 넘겨 계속되었다. 아무리 여름 초엽이라 해도 산중의 밤은 아직 차가웠다. 늦은 밤, 노스님의 법구가 뻘건 장작과 함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잿더미로 변해갔다. 밤새 물끄러미 꺼져가는 잿더미 속 불씨를 지켜보는데 존재의 허망함과 무상함이 사무쳤다. 건장하고 강건했던 육신은 어느새 노구가 되었고 지금 그 노구마저 하얀 연기가 되고 회색빛 잿더미로 변해갈 뿐이다. 죽음 앞에서는 삶의 모든 것이 초기화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혼란스러웠던 나의 욕망과 번뇌, 질투, 명예욕 등등이 엄동설한 화로 위로 떨어지는 눈발처럼 삽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노스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몸소 육신의 무상함을 드러내시면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매서운 죽비 경책을 하셨다.
이제 누구에게 길을 묻고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하지만 미련한 제자는 아직 그 곁을 밤새도록 맴돌며 지키고 있다. 그나마 이번 생에 운 좋게도 노스님과 사제의 인연을 맺게 되어 다행스럽다. 스님이시여, 못다 이룬 미련도 미망도 모두 다 태워버린 채 부디 잘 가시고,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스승이 되어 주시길 기원합니다. 화창한 봄날, 나의 스승 나의 노스님은 그렇게 왔다가 이렇게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