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사십이면 본인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 있다. 살아가는 동안 몸을 대표하는 그것을 문지르고 닦지만, 그것만으로 얼굴은 관리되는 게 아니다. 세월이 와서 주무르는 데 피할 방법이 어디 있겠나. 그러니 저 말은 살아간다는 것의 단정함과 엄숙함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보다 더 서늘한 말도 있다. 사람의 뒷모습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 자신의 뒷모습을 아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이 광명한 세상에 유일한 맹점이 있다면 그건 본인뿐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자기를 보지 못하고, 자신을 잊어버리고 종내에는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운명인가 보다.
누구나 가까이에 짊어지고 있는 뒷모습. 결코 볼 수 없는 모습. 자주는 아니고 어쩌다 한 번씩 꼭 펴보는 책이 있다. 인물의 뒷모습을 찍은 흑백사진과 깊은 사유가 뒷받침하는 짧은 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작가,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집 <뒷모습>이다. 사진도 좋지만 밀도 높은 글이 읽는 이를 사로잡는다. 뒷모습은 많은 말을 한다.
뒤는 어디에 있는가. 앞은 완강하다. 뒤에 기척이 있어 뒤돌아보면, 뒤도 앞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니 뒤는 보지 않고 보는 것. 돌아서지 않은 채 보아야 하는 것이다. 햇빛을 구부릴 수 없으니 마음을 구부리라는 것. 그럴 때 그곳에 잠깐 보이는 게 뒷모습 아닌가.
책으로 <뒷모습>이라면 영화로 뒷모습은 단연 <화양연화>다. 영화에는 뒷모습이 자주 깊게 등장한다. 축구에서 볼 점유율을 다투듯, 화면에서 앞모습과 뒷모습의 비율을 따지면 뒷모습이 뒤지지 않을 것이다. 뒷모습이 주역이니 보는 이가 곧 주인공이겠다. 세상 모든 이들이 자신을 배우로 갈아 끼워도 되는 영화. ‘화양연화’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절을 뜻한다. 그러니 누구에게나 꼭 있기 마련인 화양연화는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 가고 난 뒤에 남는 것, 나중에 회한과 함께 알게 된다는 것. 또한 그건 어쩌면 지금도 자신의 뒷모습에 퇴적되는 중이라고 영화는 말해주는 것 같다.
모든 뒤는 앞에 있다. 나만 쏙 빼놓은 채 나를 기다리는 곳이다. 저기 풍경을 앞세우는 햇빛 뒤의 검은 사실들을 부디 잊지 말기를, 나는 나한테 경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