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사랑일 뿐이다. 사랑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을 하나 소개하겠다. 아풀레이우스(서기 2세기)가 쓴 <황금 당나귀>라는 소설이다. 루키우스라는 젊은이가 마법을 좋아하다가 실수로 당나귀로 변신하여 고생하다 사람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여느 술집에서 들을 수 있는 온갖 음담패설들을 모아 놓은 이야기다. 서양 고대의 로마식 ‘야동물의 끝판왕’이다. 온갖 애정 행각이 나열되어 있음에도 작품의 밑바탕에는 순수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는 작가의 숨은 생각이 깔려 있다.
작품은 사랑이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가 목적임을 강조한다. 작품은 육욕에 봉사하는 사랑은 채워지면 곧 비워지는 욕구이고, 사랑을 이용해서 재물을 획득하는 것은 결핍의 가련한 욕심이며, 사랑을 이용해서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려는 것도 망가진 허영에 뿌리내린 욕망의 허망한 끝자락에 불과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는 특히 <큐피드와 프시케의 사랑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
이를테면, 사랑을 이용해서 재물을 얻으려고 했던 프시케의 언니들 이야기는 욕심의 올무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준다. 아들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베누스의 사랑도 흥미롭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근친상간까지 시도했던 여신의 경우는 막장 드라마의 원조이다. 결정적으로 큐피드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사랑했던 프시케의 경우도 사랑이 욕망의 노예에 불과했음을 잘 보여준다.
욕구, 욕심, 욕망! 사랑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사랑을 불순한 관계로 변질시키는 힘의 실체들이다. 플라톤은 이렇게 순수성을 상실한 사랑을 ‘범속의 사랑(eros pandemos, <향연> 180d)’이라 부른다. 이런 범속의 사랑에 맞서 아풀레이우스는 ‘사랑은 사랑일 뿐’이라고 한다. 플라톤은 이런 순수한 사랑을 ‘천상의 사랑(eros ouranios, <향연> 180e)’으로 부른다. 사랑 그 자체의 고유한(auto kath’ auto) 목적에 충실해야 순수한 사랑이라는 소리다. 모든 것은 그 자체의 고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대개는 어떤 것이 그 목적에서 벗어날 때에 사달이 나기 마련인데, 사랑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주는 작품이 <황금 당나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