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문학의 시작은 인쇄술의 발달로 인한 묵독에 있으며, 그 묵독으로 인해 우리는 내면성을 얻었습니다. 인쇄된 문학은 바로 그 ‘앎’을 정제하여 나누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낭독회에서의 시 읽기와 듣기는 ‘앎’을 나눈다는 문학의 일로부터 멀어져서, 다시 예전과 같이, 마음과 감각을 공유하고 퍼트리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시는 원래 시각적인 매체가 아니었고 청각적인 매체였다. 모두가 함께 부르고 들으며 나누는 노래 같은 것이었다.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여럿이 함께 이야기를 들으며 서로 즉각적으로 반응을 나누는 일이었다. 황인찬 시인은 “그때 문학이란 여러 시공의 마음과 감각을 하나로 묶어주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지금은 낭독이 아닌 묵독이 보편적인 문학 읽기의 형식이 됐다. 인쇄술의 발명과 책의 보급 이후 문학은 “낭독하는 것에서 묵독하는 것으로, 공동체의 것에서 내면적인 것”으로 변했다. 시인은 10여년 전 젠트리피케이션에 저항했던 식당 ‘두리반’에서 진행했던 한 낭독회의 경험을 통해 “문학이란, 시란 여전히 낭독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