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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단단한 일상이 만드는 ‘완벽한 날들’

빔 벤더스 감독·야쿠쇼 고지 주연의 <퍼펙트 데이즈>

빔 벤더스 감독·야쿠쇼 고지 주연의 <퍼펙트 데이즈>

새벽에 일어나 싱크대에서 세수하고, 화분에 물을 준다. 도쿄 시부야구의 화장실을 돌며 청소하고, 점심시간이 되면 한적한 신사에서 나무와 햇살을 보며 샌드위치를 먹는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면 동네 공중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아사쿠사역 근처 허름한 선술집에서 하이볼을 마신다. 작은 다다미방에서, 스탠드 불빛으로 윌리엄 포크너의 문고본을 읽다가 잠이 든다.

이 정도면 완벽한 날들일까?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새로운 영화와 세계를 꿈꾸었던 뉴 저먼 시네마의 기수였고, 현대인의 삭막한 마음을 위로하는 <파리 텍사스>와 <베를린 천사의 시>를 연출했고,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과 <피나>로 현대 예술의 지고한 아름다움을 영상으로 담아냈던 빔 벤더스가 일본의 한 중년 남자의 일상을 그린 영화 <퍼펙트 데이즈>다.

예고편을 보고 생각했다. 소박한 일상만으로 완벽한 날들이라고. 짐 자무시의 <패터슨>(2016)을 보면서도 그랬다. 소도시에 사는 패터슨은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출근하여 시내버스를 운전한다. 퇴근하면 개와 함께 산책하고, 동네 펍에서 맥주를 한 잔 마신다. 버스에서, 길에서, 펍에서 사람과 세상을 관찰하고, 틈이 나면 작은 노트에 시를 쓴다. 아내인 로라는 너무 좋은 시라며 투고를 권하지만, 패터슨은 망설인다. 작고 단단한 일상만으로도 ‘완벽’한데 저 너머를 꿈꿀 필요가 있을까?

히라야마는 애니멀즈와 패티 스미스와 밴 모리슨 등 1970년대 팝송을 카세트테이프로 듣고, 매일 같은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낡은 필름 카메라로 찍는다. 주말마다 헌책방에서 100엔짜리 문고본을 한 권 사서 읽는다. 과거의 문화에 둘러싸인 그는 밤마다 어제와 과거의 일을 꿈꾸고는 깨어난다. 그리고 아침에 집을 나서며 늘, 미소를 띤다.

웃음은 히라야마가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다. 같이 일하는 후배가 늦게 오고 대충 일을 해도 히라야마는 웃으며 넘어간다. 혼자 우는 아이를 찾아줬어도 젊은 엄마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다. 그래도 뒤돌아보며 손을 흔드는 아이를 보며 웃는다. 불합리한 일을 만나도, 무례한 사람이 시비를 걸어도 아무 말 없이, 웃으며 넘어간다. 매일 반복하는 일상을 유지할 수 있다면, 작은 불행과 사고들은 웃으며 지나갈 수 있다.

이렇듯 소박한 삶을 꿈꾸는 이들이 주변에도 조금씩 늘어나는 것 같다. 하지만 히라야마의 ‘완벽한 날들’은 한순간 찾아오는 게 아니라, 매일 반복하며 쌓아가는 과정을 통해 쟁취하고 유지해야 한다. 무책임한 후배가 전화 한 통으로 일을 그만두자, 히라야마는 밤늦게까지 일한다. 목욕탕을 갈 수 없고, 하이볼 한 잔도 할 수 없다. 주말의 안온한 휴식마저 흐트러진다. 히라야마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모든 것은 변한다. 그렇기에 ‘완벽한 날들’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마음을 다잡고, 견고한 일상을 힘껏 세우면서 걸어가야 한다. 악착같이 버티면서 만들어가는, 소소한 일상이다.

히라야마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을 고르자, 책방 주인은 말한다. 공포와 불안이 별개임을 정말 잘 그린 작가라고. 우리는 언제나 불안하다. 미래만이 아니라 지금의 나, 나의 생활이 제대로 된 것인지 의심이 간다. 공포가 아닌 불안은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드는 힘이다. 불안이 있어야 매일 단련하며 나를 만들고,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있다. 매일 같은 일상이라고 보이지만 오늘과 내일은 다르다. 그래서 히라야마는 오늘의 사진을 찍고, 패터슨은 시를 쓴다. 세상에 보여주지 않겠지만, 자신이 본 세상을 충실하게 기록한다.

비슷한 정서일 것이라 예상했지만, <패터슨>과 <퍼펙트 데이즈>는 다르다. 소박한 일상은 같다. 지금 이곳 이상의 세계를 원하지 않는 점도 같다. 그러나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에게는 과거가 있다. 지금과 단절된, 다른 세계에 속했던 시절의 사람과 기억들. 갑자기 조카가 찾아오면서, 히라야마의 과거가 불쑥 솟아오른다. 히라야마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담담하지만 완강하게 거부한다. 그는 무엇인가를 모두 버린 후, 다른 세계에 자신의 일상을 재구축한 사람이다. 여전히 슬프고, 여전히 힘들지만, 오늘도 웃으며 단단한 일상을 꾸준하게 쌓아가는 사람. 마지막 장면, 희로애락이 가득한 히라야마의 얼굴 위로 니나 시몬의 ‘필링 굿’이 흐른다. 다음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우리는 소소한 기쁨을 성실하게 발견하고 웃으며 살아가고 있다.

김봉석 문화평론가

김봉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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