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타전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비디오방’에 처음 간 것은 대학에 입학한 해의 봄이었다. 공강 시간에 동기 남자아이가 “포켓볼을 가르쳐줄까?” 묻길래 그것 말고 후문에 있는 비디오방이란 데에 가보고 싶다 답했다.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르라길래 헐렁한 원피스에 중절모 쓴, 포스터 속 갈래머리 소녀가 인상적이던 <연인>을 택했다. ‘무삭제판’이라고 빨간 글씨로 쓰여 있는 게 좀 걸렸으나 무슨 무슨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길래 호기심이 일었다. 친구의 표정이 안 좋아진 걸 무시한 채 “이거 볼래” 고집부렸다.

불편한 침묵 속에 두 시간을 보내고 나오던 중 친구가 조용히 일렀다. 앞으론 남자 동기와 단둘이 비디오방에 가지 말라고, 여긴 연인 아닌 이성 친구와 올 만한 곳이 아닌 듯하다고 말이다. 불가피한 경우라면 이렇듯 선정적인 장면이 나오는 영화 말고 무난한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고르라고 충고했다. 그 조언에 아랑곳하지 않고 난 그해 여름방학 내내 비디오방에 갔다. 외고 중국어과를 졸업한 다른 동기와 <패왕별희>를 본 것이 계기였다. 그때껏 홍콩영화라 하면 이소룡이나 성룡이 무술 연마하는 장면들만 떠올렸던, 영화적 감동이라곤 <쉰들러 리스트>나 <쇼생크 탈출>의 교훈적 감동 외엔 몰랐던 열아홉의 내게 <패왕별희>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이런 결의 감수성이 존재한다는 게 경이로웠다. 그렇게 왕가위의 전작들을 찾아보고,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이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올리브 나무 사이로> 등 그 무렵 대학가에 돌던 작품을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두 계절이 지나 겨울이 왔다. 기말시험을 마칠 무렵, 당시 유행하던 ‘시디 굽는’ 방법을 친구에게 배웠다. 음원 구매 후 자유롭게 배열하여 자신만의 음반을 꾸밀 수 있다고 했다. 한 장 만들어 얼마 후 생일을 맞을 선배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이 노래 뒤엔 뭘 넣으면 좋을까. 분위기로 봐서 이 연주곡은 맨 뒤에 넣어야 할까. 음반 제작자처럼 고심했다. 곡과 곡 사이 10초 간격을 맞추고자 초시계만 들여다봤다. 난 말을 재미나게 못하니 이 음악이 내 혀 대신 나에 대해 말해줬으면 했다. 곡명은 까만 글자로, 가수 이름은 파란 글자로 또박또박 적었다. 선배는 “고마워, 잘 들을게” 답했다.

한 주쯤 지났을까. 함께 밥을 먹으며 음악 좋았냐고 물었더니 듣다 졸려서 잤단다. 어찌나 서럽던지 돈가스 먹다 말고 울었다. 주인아저씨가 가져다주신 후식 커피도 마시지 않은 채 우린 식당을 나섰다. 당시 모교 후문 사거리엔 레코드 가게가 하나 있었다. 거기로 날 데려간 그는 김동률의 솔로 음반을 사줬다. 표지엔 길게 야윈 김동률이 뿔테안경을 쓰고 있었던가. 계속 미안했던지 며칠 후 눈이 오던 날 그가 영화를 보자고 했다. 영화관 가는 줄 알고 신나서 버스정류장으로 걸음을 착 떼었지만, 우리가 간 곳은 비디오방이었다. 로맨틱 코미디를 고르라던 동기의 조언이 떠올랐으나 이번에도 어떤 영화제 수상작이라던 <그린 파파야 향기>를 집어 들었다. 영화 속 시간이 흘러 성장한 여주인공은 청소 도중 집주인의 여자친구가 벗어둔 아름다운 옷을 몰래 몸에 대어본다. 주인이 그 모습을 우연히 본다. 젊은 음악가인 그는 여주인공에게 글을 가르쳐준다. 한 글자 한 글자 짚으며.

옆이 조용했다. 고개 돌려보니 선배는 고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로맨틱 코미디라면 아기자기한 에피소드가 이어졌겠지. 하지만 저 이야기는 저기서 끝난다. 로맨스 같은 건 없었다. 주인공이 나였으니까. 유사한 시행착오를 몇번 거친 후엔 음악이나 소설을 누군가에게 선물로 불쑥 내밀거나 보고픈 영화를 함께 보자고 청하는 걸 그만두었다. 대신 좋았던 작품에 대해 적었다. 그 글이 언젠가 가 닿길 바라며. 평론가 아닌 나 같은 사람한테 어쩌면 글쓰기란, 나눠 듣고 나눠 보고 나눠 읽고 싶은 바람의 소심한 타전 아닐지 싶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Today`s HOT
오염 물질로 붉게 물든 사란디 개울.. 높은 튀니지 실업률, 취업을 요구하는 청년들 8년 전 화재 사고 났던 그렌펠 타워, 철거 입장 밝힌 정부 비바람과 폭풍이 휘몰아치는 미국 상황
브라질 대홍수, 침수된 거리에서 생필품을 지원받는 주민들 2월 흑인 역사의 달을 기념하는 저스틴 트뤼도 총리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인도 뉴델리 의회 선거 인도 어부와 상인들의 삶의 현장
같은 지구촌, 저마다 다르게 보내는 하루 항공기 추락 잔해 인양 작업 11명 사망한 스웨덴 총격사건, 임시 추모소 현장 발렌타인데이를 앞둔 콜롬비아의 철저한 꽃 수출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