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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담아듣는 일은 장하다

오랫동안 진행하던 도서 팟캐스트 <책읽아웃>의 마지막 녹음을 마쳤다. ‘마지막’과 ‘마치다’는 둘 다 끝을 암시하는 단어인데, 이 둘이 함께 있으니 비로소 끝났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6년 하고도 3개월이었다. 실감난다고 썼으나 아마도 시간이 좀 흐른 뒤에야 마침표가 선명해질 것 같다.

27년간 진행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면서 결국에는 눈물을 참지 못했던 최화정님이 얼핏 떠올랐다. 그는 절대 울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으나 “너무너무 수고했고 너무너무 장하다. 내가 늘 칭찬하잖아. 무슨 일을 오래 한다는 건 너무 장하고, 너는 장인이야. 훌륭하다”라는 윤여정님의 음성 편지를 듣고 오열을 참지 못했다.

마지막 방송에 임하기 전까지도 나는 내 마음의 추가 어디로 기울어져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시원섭섭함일까, 아쉬움일까, 그것도 아니면 노여움일까. 마지막 녹음날에는 청취자 사연을 소개했는데, 개중에는 미안하다는 말이 유독 많았다. 왜 미안해할까, 미안해야 하는 건 우리가 아닐까? 그제야 눈물이 줄줄 흘렀다. 이 방송을 만든 것은 우리지만, 이 방송이 지속될 수 있었던 동력은 청취자의 존재였다. 들어주셔서 감사하다고 늘 인사하면서도, 생면부지의 누군가에게 건네던 인사의 아득함이 비로소 생생해지는 순간이었다. 국내외에서 날아든 사연에는 <책읽아웃>이 당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가 빼곡 적혀 있었다. 어떤 목소리가 집안일, 산책, 여행, 출장, 출퇴근 등 일상 틈틈이 스며든다는 게 얼마나 진귀하고 소중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며칠 후, 첫 방송과 마지막 방송에 함께해준 김민정 시인에게 문자가 왔다. “애썼다 은아. 참말 장하다.” 그 문자를 읽는데 봇물 터지듯 눈물이 났다. 장하다는 말에는 대체 어떤 힘이 깃들어 있는 것일까. 요지부동, 아니 갈팡질팡하던 마음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 다름 아닌 ‘장하다’였다. 장하다는 “기상이나 인품이 훌륭하다” “크고 성대하다” “마음이 흐뭇하고 자랑스럽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뜻은 내게 아직 요원하고, 세 번째 뜻에 이제야 가까스로 도달한 느낌이 든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적에도 나는 내 몫을 다하기 위해 마음을 꼭 붙들고 스튜디오에 갔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나의 자리가 있었다. 내 자리 앞에는 매번 나의 스승이 앉아 있었다.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삶이 있었다. 귀 기울일수록 더 생생해지는 목소리가 있었다.

한 시절이 흘러간다. 말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나는 듣는 사람이었다. 잘 말하기 위해, 아니 제대로 듣기 위해 꼼꼼히 책을 읽었다. 읽는 일은 겪는 일이었다. 그가 이미 한 번 겪은 일을 머릿속에서 다시 겪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지평이 넓어지는 것은 물론, 내가 그간 일궈왔던 땅이 더욱 비옥해지기도 했다. 너비가 넓어지면서 역설적으로 밀도가 높아졌다. 그것을 듣는 것은 겯는 일이었다. 풀어지거나 넘어지지 않도록 이야기 바구니를 촘촘히 엮고 짜는 일이었다. 겪음과 겯음을 거치면서 듣는 일은 몸담는 일이 되었다. 발이 푹푹 빠지더라도 어떻게든 여기에서 저기로 건너가고자 했다. 몰랐던 세계가 거기 있었다. 그 세계로 인해 편견이 깨졌다. 깨지면서 나는 매번 깨어났다.

어쩌면 ‘장하다’가 가리키는 대상은 내가 아니라 시간이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말을 주고받으며 나직이 내쉬던 탄식이, 서로 귀를 내어주며 차오르던 공명(共鳴)이 그 시간에 있었다. 그 시간 안에서는 쓰기 이전에 읽기가, 말하기 이전에 듣기가 있었다. 보이지 않는 벽이 허물어지면 나를 둘러싼 세계가 한 뼘 더 넓어졌다. 듣는 일은 귀하다. 가려듣는 일은 보람차다. 귀담아듣는 일은 장하다.

귀함과 보람참을 거쳐 장함에 도달하는 일, 지난 6년3개월간 팟캐스터로서 사는 삶이 내게는 그랬다.

오은 시인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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