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도(東京都) 고마에(狛江)시 주택가에 자리잡은 이노카타 오가와즈카 고분 공원(猪方小川塚古墳公園). 7세기 전후 석실 고분이 있는 유적지로 규모는 작지만 방문객은 적지 않다.
온라인 방문 후기에는 ‘깨끗하고 손질이 제대로 돼있다’ ‘정리가 잘 된 공간’ 등 정갈한 고분에 대한 평가가 주를 이룬다.
“그 얘기 들을 때가 가장 기쁩니다. 이 일에 대한 보람을 느끼지요” 잘 정돈된 고분 공원은 가모 카츠요씨(79)의 작품이다. 일주일에 두 번 오전 9시 고분으로 출근해 1시간씩 청소를 한다. 시급은 시간당 1720엔으로 수입이 많진 않지만 가모씨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는 일자리다.
가모씨는 “30년 식당일을 하다 그만두고 3년 전에 새로 찾은 일”이라며 “애착이 크고 잘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했다.
돈보다 사회 공헌···40년 이상 된 ‘보람노동’
야타베 쿄씨(77)는 가모 씨와 교대로 오후에 청소를 한다. 고분 공원 관리 일을 하기 전에는 13년 간 지역 버스 회사 영업소 구내 식당에서 조리일을 했다. 고분 공원으로 소풍 온 아이들이 ‘공원이 예쁘다’고 말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비슷한 또래 동료와 같은 일을 하며 느끼는 동질감이 큰 위안이 된다”며 “급여가 더 높은 일도 있지만 이 일이 더 큰 보람이 있기 때문에 계속 하고 싶다”고 말했다.
가모 씨와 야카베 씨가 맡은 고분 공원 관리일은 고마에시 실버인재센터에서 소개 받은 일자리다. 실버인재센터는 일본 전역에 설치된 공익 사단법인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는 단체다. 관공서나 민간 기업으로부터 일감을 받아 60세 이상 노인에게 연결해주는 일종의 일자리 소개소 역할을 한다.
일감을 의뢰한 곳에서 실버인재센터에 비용을 지불하면 수수료를 떼고 노인에게 급여(배분금)를 주는 구조다. 일할 의지가 있는 노인은 누구나 연간 회비(2000엔)을 내면 가입할 수 있다. 방문 청소와 요리 등 가사 지원도 대표적인 실버인재센터 일자리에 속한다.
일본 실버인재센터 일자리는 주로 단기·임시직으로, 노동자성이 강한 일반 고용 일자리와 구분된다. 업종은 아파트·주차장과 같은 설비 관리, 공원 청소·제초 작업과 같은 관리·청소 분야에 몰려있다. 공원 청소와 등하교 교통지도 등 단순 업무가 대부분인 한국의 ‘공공형’ 노인 일자리와 유사하다. 옅은 노동자성·낮은 보수·단기직이라는 점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닮아보이는 두 일자리는 취지와 목적에서 차이가 있다. 정부 재원으로 인건비를 지급하는 한국의 공공형 일자리는 노인 빈곤층의 소득보전을 위한 복지 정책에 가깝다. 국민연금 혜택을 받지 못하는 빈곤 노인의 안전망을 메우는 역할이다.
반면 일본 실버인재센터 일자리는 노인에게 사회 참여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됐다. 노인들이 노동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그 자체로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일자리여서 일본에서는 ‘보람 노동’으로 부른다.
고마에시에서 방치 자전거 수거·관리 일을 하는 이토 리츠코씨(72)는 “일을 하면서도 또 다른 일에 도전하기 위해 실버인재센터에서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며 “일을 통해 성장하고 지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 삶이 큰 활력소”라고 했다.
노인 인구 늘었지만 실버인재센터 회원 수 감소
1980년 일본 실버인재센터의 보람 노동은 소득이 있는 고용과 자원봉사 활동을 접목한 새로운 노인 일자리 모델로 평가받았다.
고마에시는 보람 노동 모델이 지역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대표적인 사례다. 노인 ‘댄스 그룹’을 결성해 주목을 받는가 하면, 솜씨 좋은 회원들이 모여 의류 공방을 운영하며 수익을 올리기도 한다. 고마에시 실버인재센터 외부 활동이 유명세를 타면서 해마다 회원 수가 늘고 있다.
하지만 고마에시는 특별한 몇몇 사례에 해당할 뿐 전국 실버인재센터 여건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당장 회원 수부터 줄고 있다. 실버인재센터 전체 회원 수는 2009년 79만1859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거듭 감소해 2022년 68만1739명으로 줄었다. 일본 65세 이상 노인인구(3623만명·2023년 기준)의 2%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일본 노인들이 실버인재센터를 외면하는 배경은 오랜 불황으로 인한 경기 침체에 있다. 단기·저소득 일자리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노인들이 취업 전선에 뛰어들고 있는 것이다. 연금 고갈에 대한 불안감도 노인들을 정식 고용 시장으로 내몰고 있다. 고령화 심화로 연금 고갈 문제가 확산되면서 노후 대비를 위한 노인 일자리 수요가 늘고 있다.
이케다 아케미 고마에시 실버인재센터 사무국장(64)은 “실버인재센터 회원 감소의 가장 큰 원인은 고물가와 경기 침체”라며 “우리는 다행히 회원 수가 늘고 있지만 외부 환경 변화를 감안해 실버인재센터를 통한 취업의 장점을 더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인들, 급여 더 많은 정식 일자리로 떠나
실버인재센터 회원 이탈을 막기 위해 알선 일자리에 고용 성격을 강화하는 조치가 이어졌다. 2004년 고령자고용안정법 개정을 통해 실버인재센터의 일반노동자 파견사업(실버파견사업)을 허용했고, 2016년에는 주 20시간 취업 시간을 주 40시간으로 확대하고 월 10일 이내 노동일 수 제한도 폐지했다. 하지만 잇따른 조치에도 회원 이탈 흐름은 지속됐다. 보람노동을 내건 실버인재센터의 정체성만 잃은 셈이다.
일손 부족이 심각해지자 일본 정부 역시 보람 노동 대신 고령자의 정식 취업을 독려하고 있다. 2013년 ‘고령자 고용안정법’ 시행으로 65세까지 고용을 보장하는 한편 2020년에는 70세까지 고용연장 노력을 의무화하도록 법을 개정했다. 생산가능 인력(만 15∼64세) 감소가 심화되자 노인을 통해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고 있는 셈이다.
박기훈 교수(서울 사이버대 사회복지학)는 2021년 발표한 논문 ‘정년퇴직 후 노인의 노동 능력 활용’에서 “일본의 실버인재센터 사업이 노동적 성격이 강해지면서 노동경쟁력이 우수한 노인은 다른 곳을 택하고, 노동능력이 약한 노인은 센터에서 일을 구하기 어려운 구조”라며 “고령화로 노인인구가 증가하고 있음에도 실버인재센터 수는 오히려 감소하는 어정쩡한 상태”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