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명종 2년(1547) 경연 자리에서 특진관 최연은 열셋 어린 나이의 임금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도참설(예언)은 모두 근거가 없는 말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여 나라를 다스리는 데 방해가 됩니다. 우리나라도 건국 초기엔 이런 도참설로 노래를 짓기도 했으나 태종께서 ‘어디 이런 요사스러운 도참설을 숭상하겠느냐’며 없애게 하였습니다. 고려에서는 사람들이 송악산 등지에서 무당들을 데리고 제사를 지냈는데, 태종께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 지내는 제사는 신이 흠향하지 않는다며 혁파했습니다. 또 세종께서는 연말에 산천에서 지내는 치성도 혁파했으며, 성종은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는 축수재를, 중종은 불교식으로 지내는 기신재를 혁파했습니다. 이런 것이 우리 왕조의 가법이며 옛일이니 오늘날 모두 본받아야 합니다.”
중종의 아들 명종은 형인 인종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예정에 없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경연에 매진하던 시기, 경연관 최연은 비유교적인 의례나 비합리적인 예언에 혹하지 말라고 충고한 것이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최연이 중종 대까지의 역사를 국왕의 단호한 결단 아래 여러 이단들을 점진적으로 혁파해온, 일관된 서사로 구성했다는 점이다. 그가 거론한 일들은 지어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실 이단 혁파의 역사는 그렇게 일관된 경로로 진행되지 않았다. 태종은 분명 여러 영험한 산천에서 일반인들이 무당을 끼고 벌이는 제사들을 금지시킨 적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조처만으로 이런 산천 제사가 금단되지는 않았다. 심지어 말년의 태종은 산천 제사를 금지시키지 말라고 자기 말을 뒤집기도 했다. 축수재나 기신재 역시, 국가적으로 지내는 것이 축소됐을 뿐 왕실에서 행하는 의례로는 지속되었다. 또 이런 서사에는 세종의 내불당 설치라든가 세조 대의 불교나 도참설의 유행 같은 부분은 빠져 있다. 최연은 작은 사실은 키우고 어긋나는 사실들은 제외하여 매끄러운 서사를 완성하면서, 그것이야말로 우리 왕조의 전통이라고 역설했다.
최연에게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분명하게 겨냥하는 목표가 있었다. 꼭 문정왕후가 이런 비유교적인 의례에 상당히 경도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올린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 이전 시대 신하들이 비유교적인 의례들, 불교사찰들을 없애자고 할 때마다, 국왕이나 왕실 여성들은 이것이 대대로 해오던 우리 왕조의 전통이니 함부로 없앴을 수 없다며 거부하곤 했다. 최연은 바로 그 논리를 겨냥하여 우리 왕조의 전통은 그런 비유교적인 것들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없애는 것이라고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새삼 최연의 주장을 짚어본 것은 조선시대 유교화 과정을 설명하려는 게 아니다. 오늘 제시하려는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8조, “매끄러운 서사를 경계하라”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어떤 주장이나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일련의 사례와 논리를 엮어 하나의 서사를 만든다. 서사가 매끄러울수록 그 주장과 메시지는 설득력이 생긴다. 최연의 이야기만 들으면 태종-세종-성종-중종을 본받아 나 명종도 뭔가 새로운 이단 혁파의 조처를 내려야만 할 것 같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허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서사가 완벽할수록, 거기에는 빠진 사실들, 작은 사실의 과대 해석 같은 ‘마사지’가 존재한다. ‘침소봉대’와 ‘아전인수’는 이런 마사지 기계의 모드 1번과 2번이다. 우리의 삶과 사회는 울퉁불퉁하고, 역사의 경로도 구불구불하지 않던가? 그런 삶과 경로를 떠올려본다면, ‘매끄러운 서사’란 것이 얼마나 현실과 다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매끄러운 서사는 강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그 메시지를 정확히 파악하기 전에 그 서사부터 덜컥 믿어버리면 안 된다. 이것이 오늘 명심해야 할 역사 리터러시 규칙 제8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