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재벌의 분할·합병이 다시 시작되었다. 계열사를 떼고 붙이는 것 말이다.
두산그룹은 3단계 떼고 붙이기다. 먼저 두산에너빌리티를 사업회사(존속법인)와 신설 투자법인으로 인적분할하고, 신설 투자법인이 두산밥캣의 지분을 소유한다. 그리고 두산로보틱스는 신설 투자법인과 합병한다. 마지막으로 두산로보틱스는 두산밥캣 주주와 포괄적 주식 교환을 통해 두산밥캣을 완전자회사로 만든다. SK그룹은 SK이노베이션이 SK E&S를 흡수합병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SK이노베이션이 지분 89.5%를 소유하고 있는 SK온은 SK이노베이션의 완전자회사인 SK트레이딩인터내셔널과 SK엔텀을 각각 흡수합병하기로 결정했다.
일반인들은 이해조차 힘든 이러한 계열사 분할·합병은 누군가에겐 이득을, 누군가에겐 손해를 입힌다. 일반주주들이 손해를 보고 총수가 이득을 본 경우가 많았다. 결론부터 말하자. 앞으로 현 정권의 남은 기간 동안 총수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거 다할 것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일반주주들이 다칠 것이다.
우선 재벌은 현 정권의 남은 기간이 총수의 사법 리스크가 가장 작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 총수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는 것은 사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상장회사에서 지배주주가 사익을 추구하면 당연히 법적 리스크가 따른다.
그중 총수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검찰이다. 검찰의 배임·횡령 수사 말이다. 그런데 한동훈이 국민의힘 대표가 되면서 정국은 묘해졌다. 정권 후반기 검찰은 윤석열 대통령과 한 대표 사이의 힘겨루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정치 관련 수사의 블랙홀에 빠져 재벌 수사에 역량을 투입할 조건이 안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또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배임죄 폐지까지 언급한 상황에서 총수에 대한 배임죄 적용에도 발목이 잡혀버렸다. 이래저래 검찰의 우선순위에서 재벌 수사는 밀릴 거라 볼 수 있다.
둘째, 재벌은 현 정부가 지배구조 개혁을 위한 법 개정에 진정성이 없고 자기편이라는 확신을 굳힌 것 같다. 예를 들어 상법 개정을 통해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고려하도록 할 경우 계열사 이사회에서 분할·합병안 통과가 어려워질 수 있다. 분할·합병이야말로 총수와 일반주주의 이해가 충돌하는 사안인데 이사들이 일방적으로 총수의 편을 들고 일반주주를 무시하다가 법적으로 큰코다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즉, 총수와 재벌전략가들은 현 정권의 남은 기간이 법 개정 없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판단에는 근거가 있어 보인다. 얼마 전 이복현 금감원장이 직접 상법 개정을 언급했으나 도무지 추진력이 생기지 않고 심지어 여당 의원이 금감원장의 월권을 언급했다. 정권실세가 직접 언급한 것이 이러기도 쉽지는 않다. 그건 우리가 모르는 상법 개정을 반대하는 강한 힘이 작동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또, 얼마 전 발표한 세법개정안을 보면 총수는 최대 33% 상속세 절감 효과를 본다. 여기에 금투세 폐지, 가업상속공제 완화까지 합쳐지면 과거 어느 정부에서도 하지 않았던 총수 맞춤형 감세 패키지이다. 재벌 입장에서는 이 골든타임을 놓칠 수 없다.
셋째, 재벌은 지금이 윤 대통령에게 뭔가를 받아낼 적기라 보는 것 같다. 우리는 부산 떡볶이 먹방을 기억한다. 부산엑스포 유치 실패 이후 부산 민심을 달랜다고 윤 대통령이 재벌 총수들을 병풍 삼아 부산의 한 시장에서 떡볶이, 튀김 등을 사먹었다. 총수들이 직접 엑스포 유치에 적극 나섰을 뿐 아니라 실패 이후의 뒤처리까지 도와줬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다만 재벌들이 언제 대가를 요구할 것인가의 시기 문제만 있을 뿐. 한 국가의 서슬 퍼런 최고 권력자에게 언제 대가를 요구할 수 있을까? 그가 약해질 때다. 낮은 지지율, 여당 내 권력지형, 김건희 여사·채 상병 수사 등 윤 대통령 상황은 어느 하나 녹록지 않다. 정황상 지금이 재벌이 윤 대통령에게 대가를 받아가기 좋고, 어쩌면 받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분할·합병을 할 수 있는 건 적어도 정권이 비토를 놓지 않는다는 자신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재벌의 정보력과 정세판단력은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벌은 현 정권의 남은 임기를 총수를 위한 자유시간으로 규정했다. 아마 유일한 변수로 생각하는 것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의 지배구조개선에 대한 입장일 테다. 두 사람은 알맹이 없는 밸류업에 뿔난 주주들을 금투세 폐지로 달래려는 윤 대통령과 다르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