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퇴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이어져온 정점식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이 1일 결국 사퇴했다.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한동훈 대표에게 유임을 요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통령실의 당무 개입 논란을 서둘러 진화하기 위해 자진 사퇴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친윤석열(친윤)계의 분화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친윤계로 분류되는 정 의장은 이날 오후 5시쯤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저는 이 시간부로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직에서 사임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정 의장은 지난 31일 오후 2시쯤 한 대표와 면담 과정에서 사임 요구를 받았다고 밝히며 “(한 대표가) 우리 당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싶다. 그렇다면 새로운 인물과 함께 시작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간곡하게 말씀하셨다”며 “그 이후 고민을 많이 하고 원내대표와 상의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정 의장은 “결국은 우리 당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는 제가 사퇴하는 게 맞다는 생각을 갖고 이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실과 거취 논의 문제를 논의했냐는 질문에 “전혀 그런 건 없었다”고 강조했다.
앞서 한동훈 대표는 이날 오후 3시쯤 한덕수 국무총리 접견 후 기자들과 만나 정 의장이 한 대표 측의 사퇴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는 것과 관련해 “인선은 당대표 권한”이라며 “당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전당대회에서의 당심과 민심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정 정책위의장을 향해 처음으로 직접 사퇴를 요구하는 취지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앞서 서범수 사무총장도 지난 31일 당대표가 임명권을 갖는 당직자로부터 일괄 사표를 받겠다는 뜻을 밝히며 정 정책위의장의 사의 표명을 요구했다.
정 의장의 사퇴는 윤석열 대통령의 당무 개입 논란이 커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특히 대통령실이 한 대표에게 정 정책위의장 유임을 요구했다는 사실도 이날 알려졌다.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난달 30일 한 대표, 추경호 원내대표와 저녁식사를 하며 정 의장을 유임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전달했다.
이를 두고 당 일각에서는 윤 대통령이 당무개입을 한 것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한 친한계 의원은 이날 통화에서 “당무개입 차단용”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이 직접 의견을 전달할 경우 당무개입 논란이 있을 수 있으니 참모들을 통해 우회 전달했다는 의미다. 한 국민의힘 관계자는 “정진석 실장이 (정책위의장을 유임하라고) 한 말이 (윤 대통령의) 진심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대통령실은 정 실장의 정치적 조언일 뿐이라며 ‘윤심’(윤 대통령의 의중) 전달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통화에서 참모들의 의견 전달이 ‘윤심’이냐는 질문에 “대통령이 일정이 바쁜데 거기에(정책위의장 인선에) 매몰돼 있겠느냐”며 “마이너스 정치를 하지 말고 사람들을 끌어안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전한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정 의장의 사퇴 배경에는 용산의 교통정리가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한 친한계 인사는 통화에서 “용산 입장에서는 당무개입 논란을 서둘러 차단해야 한다”며 “용산이 (정 정책위의장 인선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고, 정진석 비서실장이 개인적인 생각을 얘기한 것이고 대통령은 전혀 관심이 없다고 정리하려면 정 정책위의장이 빨리 사퇴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 의장이 사퇴하면서 한 대표 측은 골치아픈 인선 논란의 퇴로를 찾았다. 하지만 이번 인선 논란을 통해 한 대표 측의 정치 경험 부족이 드러났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국민의힘 관계자는 “당대표 임명 직후 곧바로 인사를 했어야 했는데 질질 끌면서 문제가 됐다. (정치 많이 안 해본) 실력이 드러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민의힘 당대표를 지낸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은 CBS 라디오에서 “정점식 의원은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임명하면 끝나는 것”이라며 “제발 물러나주십시오. 물러나시면 제가 임명 이런 거 자체가 지금 뭔가 꼬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 국민의힘 중진 의원은 정 의장, 한 대표 모두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통화에서 정 정책위의장을 향해서는 “대통령 눈치보며 결정을 미룬 건데, 검찰 공무원일 때나 그렇게 하는거지 저게 정치인인 것이냐”고 꼬집었다. 한 대표를 향해서도 “5대4, 4대5 이런 게 크게 의미 없는데 한 대표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다”며 “애초에 유임하고 탕평인사하고 넘어갔으면 될 일을, 사의 표명하면 재신임하네 마네 뭐 어디서 이상한 걸 배워온 것이냐”고 지적했다.
윤 대통령과 친윤계가 분리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한 국민의힘 관계자는 통화에서 “한 대표와 같이 갈 수밖에 없는 윤 대통령과 한 대표와 같이 갈 수 없는 친윤 의원들의 생존 방정식은 이미 반대가 됐다”고 말했다. 충분한 임기가 보장된 친윤 의원들과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 후 당 지도부의 도움이 필요한 윤 대통령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는 취지다. 한 국민의힘 의원은 통화에서 “용산 참모들은 윤 대통령과 한 대표 사이가 좋아야 하니까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을 거고, 친윤계 의원들은 대통령에게 한 대표가 너무 한 거 아니냐면서 (윤 대통령 메시지를 두고)서로 자기들 입장에서 유리하게 해석해서 얘기하는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인선을 둘러싼 한 대표와 친윤계의 힘겨루기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추경호 원내대표는 정책위의장 인선을 한 대표에게 추천할 생각이 있냐는 질문에 “제가 알아서 당헌당규에 따라 잘하겠다”고 답했다. 당직 인선 과정에서 당헌·당규에 규정된 원내대표의 권한을 행사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당헌·당규상 정책위의장은 당대표가 임명 권한을 갖지만 원내대표와 협의를 거쳐야 하고, 의원총회에서 추인도 받아야 한다. 한 친한계 인사는 통화에서 “끝까지 이렇게 나오나”라며 친윤계의 대응에 대해 불쾌함을 드러냈다.
한 대표는 2일 곧바로 정책위의장과 지명직 최고위원 인선을 발표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책위의장에는 계파색이 옅은 대구 4선 김상훈 의원이 유력 거론되고, 경기 3선 김성원, 경북 3선 송언석 의원 이름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