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된 쿠데타, 8월 종파 사건
김재웅 지음|푸른역사|652쪽|3만3000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들 중 유일하게 권력 세습 체제로 작동한다. 명칭에 ‘공화국’이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으나,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한다는 점에서 왕정과 다를 바 없다. 좌파 항일 운동가들이 국가 수립에 참여한 북한이 이처럼 경직된 체제를 유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사 연구자인 김재웅 박사의 <예고된 쿠데타, 8월 종파 사건>은 북한의 공식 역사에서 ‘8월 종파 사건’으로 알려진 대숙청 사건이 오늘날 북한 체제를 만든 결정적 분기점이 됐다고 본다. 김일성의 권력에 도전했던 연안파와 소련파 인사들이 1956년 8월30일 조선노동당 전원회의 이후 대거 숙청되면서 체제 개혁의 가능성이 소진됐고, 그 결과 김일성 1인 지배 체제가 공고해졌다는 것이다.
북한 공식 역사에서 ‘8월 종파 사건’은 “극악무도한 반혁명 분자들이 체제를 전복할 목적 아래, 의도적으로 당에 잠입해 오래전부터 꾸며온 치밀한 모략”으로 평가돼왔다. 국내 연구자들 사이에선 오랫동안 분파투쟁이나 경제노선을 둘러싼 갈등으로 인식됐다. 저자는 구소련 자료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바탕으로 앞선 두 해석을 모두 지양하고 ‘양심적 공산주의자들의 실패한 혁명’이라고 재평가한다.
전후 북한은 심각한 식량난과 열악한 보건의료 상황으로 인민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이었다. 북한 지도부는 인민들의 생활고를 외면한 채 중공업 우선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양곡 수매사업과 농업협동화를 강압적으로 시행했다. 이 때문에 농민 300여명이 자살하고 수만 명이 굶어죽었다. 대외적으로는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쇼프가 서기장이 되면서 스탈린주의를 추종하는 북한 지도부와 소련의 갈등이 커졌다.
북한 지도부는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련계 한인들을 통제하는 작업에 나선다. 소련계 한인들은 1945년 8월부터 1950년대에 소련 정부가 북한에 파견한 고려인들이다. 처음에는 주로 통역 등 실무를 담당했으나 이후 소련의 권위를 업고 당·정·군의 핵심 요직을 차지했다. 김일성과 측근 그룹은 자신들이 전면에 나서는 대신 국가검열성 부상 서휘, 평양시당 위원장 고봉기, 문화선전성 부상 김강 등 연안계 인사들을 이용해 소련계 한인 간부들에 대한 공세를 펼쳤다. 소련계 한인 간부들 중 최고위직이었던 박창옥, 박영빈, 기석복, 정률, 전동혁 등 5명은 “반동적 부르죠아 분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1956년 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는 김일성 1인 지배 체제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인사들이 집결하는 계기가 됐다. 흐루쇼프는 비밀 연설에서 스탈린의 개인숭배 조장, 집단지도체제와 당내 민주주의 외면 행적을 맹렬하게 비판했는데, 이는 고스란히 김일성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비판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조선의용군 제3지대장 출신으로 당시 소련 주재 북한대사였던 이상조의 활동과 발언에 각별한 무게를 싣는다. “정의롭고도 열정적인 혁명가인” 이상조는 소련 외무성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소련이 북한의 변화를 끌어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한 인물이다. 이상조는 김일성 체제에 비판적인 인물들과 두루 접촉하며 세력을 만들어나갔다. 서휘, 윤공흠, 이필규, 고봉기, 최창익 등이 대표적이다.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가 불러온 개인숭배 반대 운동은 이상조와 같은 정의로운 혁명가들의 비판의식을 일깨웠다. 북한의 현 상황이 과연 그들이 꿈꿔온 해방된 세상의 모습인지 의문을 품었던 많은 혁명가들이 그의 생각에 공감했다.” 이상조는 서휘와 함께 김일성을 찾아가 개인숭배와 독재정치를 청산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북한 지도부가 찍어누르려 했던 소련계 한인들도 김일성 비판 대열에 합류했다. 소련계 한인들은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 이후 자신감을 되찾은 상태였다. 연안계와 소련계 한인들은 한때 서로 적대했으나 김일성 비판이라는 대의 앞에 뭉치기로 한 것이다. 소련도 외무성과 북한 주재 소련대사관을 통해 반김일성 세력과 접촉하면서 힘을 실었다.
반김일성 세력은 1956년 8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김일성과 측근들을 집중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저자에 따르면 이들은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게 하고 당과 내각, 군부의 권력을 분산시켜 집단지도체제를 만드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김일성과 그의 측근들도 소련을 대상으로 외교전을 펼치는 동시에 회유 작업에 나서는 등 반격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운명은 반김일성 세력을 외면했다. 소련은 1956년 스탈린 격하 운동에 고무된 폴란드 노동자들이 대규모 파업과 시위를 벌이고 헝가리에서도 정치적 격변이 일어나자 개인숭배 반대운동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소련은 1956년 8월2일 전문을 통해 김일성의 실각을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김일성에게 전했다. “팽팽하던 승부의 추는 갑자기 김일성과 그의 측근들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1956년 8월30일 조선노동당 중앙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열렸으나 회의는 소란 끝에 김일성 측이 원하던 시나리오로 끝났다. 가담자들에 대한 대숙청이 시작됐다. 9월 중소 공동대표단이 북한을 찾아 처벌 결정을 철회하라고 압력을 넣으면서 제동이 걸리는 듯했으나, 1957년 흐루쇼프가 자신에 대한 비판 세력을 ‘반당그룹’이라고 규정하고 축출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반김일성 세력의 마지막 희망도 사라졌다.
저자는 “(8월 종파 사건으로) 일시적 타격을 받은 스탈린주의가 ‘주체’라는 이름으로 외피를 갈아입은 채,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며 북한체제의 발전과 출로 모색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한다. 남한이 4·19혁명으로 민주화의 길로 나아간 반면 북한은 ‘8월 종파 사건’ 이후 체체 변화의 씨앗이 뿌리뽑혔으며, 이와 같은 “남북한의 상반된 선택이 두 체제의 발전 양상을 근본적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