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진(24·울산시체육회)은 태극기가 하늘 높이 올라가는 것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세계 랭킹 24위의 약체로 분류됐던 그가 예상을 깨는 반란에 성공했다는 자신감이었다. 9일 프랑스 파리의 그랑 팔레에서 열린 파리 올림픽 태권도 여자 57㎏급에서 내로라하는 톱 랭커들을 잇달아 물리치면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기 때문이다.
김유진이 팔각 매트에서 선보인 반란은 놀랍기 짝이 없었다. 16강전에서 5위 하티제 일귄(튀르키예)을 2-0으로 누른 그는 8강전에서 4위인 한국계 캐나다 선수 스카일라 박도 2-0으로 꺾었다. 4강전에선 유력한 금메달 후보이자 1위인 중국의 뤄쭝스까지 2-1로 제압해 자신감을 얻었다. 결승 무대에서 만난 2위 키야니찬데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지만 단 1점만 내주며 금메달로 반란의 마침표를 찍었다.
김유진은 취재진과 만나 “너무 행복하다. 개인적인 명예와 태권도 종주국의 자존심에 보탬이 됐다”고 활짝 웃었다.
태권도처럼 체급으로 구분되는 종목은 살인적인 감량을 견뎌야 한다. 라이벌들과 비교해 키(183㎝)가 큰 축에 속하는 김유진도 예외는 아니다. 올림픽 하나만 바라본 그는 식단을 조절하며 컨디션을 유지하느라 힘든 나날을 보냈다. “제대로 먹는 건 하루에 한 끼였다. 웬만하면 식단 위주로 먹으면서 조절했다”고 떠올렸다.
그랬던 김유진이 올림픽 경기일 최고의 컨디션을 누린 것은 금메달이 “하늘에서 내린다”는 표현에 힘을 실어줬다. 김유진은 “오늘 몸을 풀 때부터 금메달을 확신했어요. 태어나서 오늘이 가장 (몸이) 좋았어요. 하늘의 뜻도 있지 않을까요?”라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상대 선수들의) 랭킹이 높다고 막 그렇게 잘하는 것은 아니었어요. 나 자신만 무너지지 말자는 마음가짐만 지켰어요. 금메달을 땄으니 언제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삼겹살에 된장찌개를 먹고 싶다”고 덧붙였다.
김유진의 금메달에는 사람의 의지도 담겼다. 8살 때 자신의 몸을 보호하라는 의미도 태권도장에 데려갔던 할머니다. 김유진은 “할머니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잠도 안 주무시고 보셨을 텐데 ‘할머니 나 드디어 금메달 땄어. 태권도 시켜줘서 너무 고마워’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마냥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뤄쭝스와 4강전을 돌아본 김유진은 “(1라운드를 7-0으로 승리한 뒤) 2라운드를 (1-7로) 내준 게 위기였다”면서 “잠시 쉬는 시간에 그동안 내가 했던 노력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 훈련을 다 이겨냈는데,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됐다는 마음으로 (3라운드를) 이겨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위기를 극복한 자신감이 또 다른 목표를 꿈꾸게 만들었다.
김유진은 “4년 뒤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눈앞의 목표라면 내년 (중국 우시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참가하는 것”이라며 “아시안게임까지 제패해 그랜드슬램을 달성해보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김유진의 이번 금메달은 한국 선수단의 13번째 금메달로 기록돼 역대 최다인 2008 베이징 올림픽과 2012 런던 올림픽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는 의미도 있다. 앞으로 1개의 금메달만 더 나온다면 새 역사가 쓰여진다. 김유진은 “올림픽 역사에 한 획을 그어서 영광”이라며 “(대회가 남은 선수들에게) 올림픽 별거 아니니까 너도 할 수 있어라고 말해주고 싶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