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연속 35일, 제주는 45일 동안 열대야가 지속되어 기상 기록을 경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있자니 김기창 작가의 소설집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 중 한편이 떠올랐다. 가까운 미래, 한국의 해안지역 소도시 민원 창구에서 근무하는 공무원 용희가 주인공이다. 끝 모를 폭염 속에 시민들이 분통을 주체하지 못하고 쏟아내는 민원을 받아내는 일상 속에서 용희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돌아가곤 하는 남자를 발견하고 관심을 갖게 된다. 그래서 찾아간 남자의 거처는 햇빛이 작열하는 옥탑방이었고 용희는 남자에게 불쑥 소리친다. “제가 지구에 커튼을 쳐 드릴게요!”라고.
지구에 커튼을 드리운다는 말은 지구온난화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 중인 여러 ‘지구공학’ 기법 중에서 인공위성에 큰 거울을 달아서 태양광을 직접 막거나 비행기로 성층권에 에어로졸을 살포하는 방법을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은 남자에게 단 하루라도 태양의 열기를 막아줄 수 있다면, 하늘의 별을 따는 것도 아닌데 그 정도도 못해 줄까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지구공학들은 여전히 개발 중이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그런 기법들을 실험실에서 실제 현장에 가져갈 때 얼마나 비용이 들고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쉬운 말로, 가능했으면 진작에 실행했을 것이다. 물론 더 큰 문제는 그런 기술 개발을 기대하는 동안 온실가스는 계속 배출되고 있고 지금 누적된 배출량으로도 향후 계속 더 크고 많은 기후 기록 경신을 만들 것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그런 기술 중심 해법에 대한 기대는 기후변화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해법 모두가 사회적 측면을 갖는다는 것을 간과하곤 한다. 조효제 교수는 기후 재난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다가오지 않으며 그 책임도 동등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며 기후위기에 대한 ‘인권적 접근’을 주문한다.
이뿐만 아니라 이상 기후는 그 자체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와 관행을 통해 구체적인 피해를 만들어낸다. 미국의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가 <폭염 사회>에서 조명하는 게 그런 단면이다. 1995년 7월 미국 시카고에 닥친 살인적인 날씨는 700명이 넘게 죽는 참사를 초래했다. 언론은 참사의 유발자를 찾는 데 골몰했고 얼마 뒤 폭염 참사는 잊혀졌지만 저자는 이 참사에 ‘사회적 부검’을 거치게 한다. 주로 노인과 빈곤층이 희생자가 되고 사회적 단절과 양극화, 원룸 주거 증가와 같은 도시의 환경, 부적절한 행정 등이 참사를 키웠다는 것이다. 그의 분석은 사회학적으로 가치가 있지만 기후위기의 일부로 다가온 지금의 폭염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사회학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학술적 연구가 이 모든 상황을 다루고 정리하기 전에 더 많은 폭염과 재난이 더 빨리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조지 거슈인의 오페라 <포기와 베스>에 나오는 유명한 자장가 ‘서머타임’에서 어머니들은 아기에게 아직 더운 여름은 견딜 만하고 이 고난이 끝나면 너는 날개를 달고 하늘로 날아오를 거라고 속삭인다. 그러나 우리와 다음 세대에겐 날갯짓의 기회가 아니라 기후붕괴가 더 현실적인 미래다. 열대야는 지나갔지만 과학적이고 사회적인 커튼을 마련하지 못한 우리들은 작은 날개를 떼어 창문을 가려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