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최대 30파운드(약 13㎏)의 무게를 들고 7시간 이상 걸을 수 있어야 함. 하루 종일 서 있고, 앉고, 걷고, 몸을 구부리고, 웅크릴 수 있어야 함. 신장 조건은 170~180㎝. 시급은 25달러(3만3000원)~48달러(6만4000원), 복리후생 제공.”
물류 창고나 건설 현장 채용 공고인가 싶지만, 아니다. 8월 초 테슬라 홈페이지에 올라온 공고다. 직책 이름이 꽤 그럴싸하다. ‘데이터 수집 운영자’. 이들이 모션캡처 수트와 가상현실(VR) 헤드셋을 착용하고 수행하는 모든 동작들은 디지털화된다. 테슬라의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 ‘옵티머스’를 훈련시키려는 목적이다. 테슬라는 지난해 이 직책에 50명 이상의 직원을 고용했다.
#“로봇 옷을 입은 사람 아냐?” 노르웨이 기업 ‘1X’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공개한 휴머노이드 로봇 ‘네오 베타’ 영상에 달린 댓글이다. 가방을 건네주는 간단한 동작인데도 움직임이 꽤 자연스럽다. 차가운 금속 재질의 여타 로봇들과 달리, 네오 베타는 인간을 닮은 곡선형 몸매에 맞춤형 전신 수트까지 입고 있어 친밀한 인상을 준다. 금속 유압장치 대신 인간의 근육과 비슷한 구조를 차용했다고 한다. 인공지능(AI)이 적용돼 주어진 작업을 학습하면서 스스로 효율성을 개선할 줄도 안다.
1X은 네오 베타가 “일상 생활에 필요한 모든 일에서 조수 역할을 하도록 설계됐다”며 “올해 말에 테스트를 위해 일부 가정에 배송될 것”이라고 밝혔다. 1X은 지난해 오픈AI 주도로 2350만달러(약 300억원) 투자를 받았으며, 삼성전자도 벤처투자 자회사를 통해 간접 투자하고 있다.
인간을 닮은 기계는 동서고금 모든 발명가의 꿈이다. 기계의 지능과 정신은 대형언어모델(LLM) 발전에 따라 최근 몇 년간 이른바 ‘J커브’를 그리며 급성장했다. 육체를 모사하는 일은 그보다 약간 까다롭다. 그러나 손과 발, 팔과 다리를 갖추고 걷고 뛰고 짐도 나르는 휴머노이드 로봇 또한 장족의 발전을 거쳐 속속 상용화 단계에 다다르고 있다.
■2000만원짜리 ‘양산형 휴머노이드’ 개발 속속
지난해 연말 공개된 옵티머스 2세대는 2022년 나온 프로토타입에 비하면 불과 1년여 만에 빠르게 발전했다. 엉거주춤 위태롭게 걷던 이전 세대와 달리, 안정적인 자세로 최대 시속 8㎞ 속도로 걸을 수 있다. 무릎을 굽혀 스쾃 자세도 취한다. 깨지기 쉬운 달걀은 조심스럽게 집는다. 손가락으로 촉각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테슬라 자동차에 들어가는 완전자율주행(FSD) 시스템이 탑재돼 갈 길을 알아서 찾는다.
사실 테슬라는 이 분야의 후발주자다. 국내에선 현대자동차그룹이 2020년 인수한 미국의 ‘보스턴다이내믹스’가 친숙하다. 설립된 지 30년이 넘는 이 회사는 로봇의 민첩한 이동성과 운동능력 면에서는 업계 최고로 꼽힌다. 4족 로봇 ‘아틀라스’와 2족 로봇 강아지 ‘스폿’이 대표 제품이다. 지난 4월 보스턴다이내믹스는 아틀라스의 ‘액추에이터’를 기존 유압식에서 전동식으로 장착한 새 모델을 내놨다. 액추에이터는 모터·제어기·감속기·센서 등으로 구성된 관절 장치로, 로봇 구동의 핵심 부품이다. 공개된 영상에는 아틀라스가 능숙하게 팔굽혀펴기를 하는 장면이 담겼다.
10만달러(약 1억3000만원)에 달하는 아틀라스의 가격은 다소 비싸다는 평가다. 로봇 강아지 스폿 또한 7만5000달러 수준이다.
휴머노이드 로봇 가격은 디자인·소재·운동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대체로 상업용은 3만~10만달러, 연구용 고급모델은 20만달러 선이다. 다소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미국 정보기술(IT)매체 씨넷은 “로봇 애호가와 기업을 위한 제품일 뿐, 일반 소비자를 위한 제품은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이에 가격대를 확 낮춘 ‘소비자용 양산형 로봇’을 내놓기 위한 시도가 활발하다. 테슬라의 목표는 옵티머스 가격을 2만달러(약 2600만원) 정도로 낮춰 공장·서비스 현장 등에 폭넓게 보급하는 것이다.
중국 로봇회사 유니트리가 최근 공개한 ‘G1’도 주목할 만하다. G1 가격은 9만9000위안, 한화 약 1850만원이다. 현대자동차의 경차 모델 ‘캐스퍼’ 한 대 값이다. 이전 모델인 ‘H1’의 9만달러(약 1억2000만원)에서 5분의1 수준으로 줄였다. 높이와 무게는 각각 1.31m·35㎏으로 초등학생 정도 크기다. 가정용 작업을 수행하는 용도로, 전선 납땜이나 프라이팬의 음식을 뒤집는 행동이 가능하다.
■AI와 로봇의 결합···“수십억대가 엄청난 데이터 학습”
인공지능 기업들도 휴머노이드에 주목한다. 인간처럼 움직이는 로봇이 생성형AI와 만나면 폭발적인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본다. 사람처럼 주위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인간 개입 없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범용인공지능(AGI)의 탄생을 앞당길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이를 두고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적응하기 가장 쉬운 로봇은 휴머노이드 로봇이다. 우리와 같은 체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람을 위해 세상을 만들었으며, 따라서 이러한 로봇(휴머노이드)을 훈련시킬 수 있는 가장 많은 양의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
오픈AI는 최근 로봇 스타트업 ‘피규어AI’와 파트너십을 맺고 4년 전 해체했던 로봇팀을 재가동했다. 피규어AI의 휴머노이드 로봇 ‘피규어01’에는 오픈AI의 챗GPT가 적용됐다. 구글 딥마인드도 올해 초 스탠퍼드대와 손잡고 양팔 로봇 ‘모바일 알로하’를 공개했다. 요리, 청소 등 집안일을 수행할 수 있다. 사람이 원격 조작으로 특정 작업을 50번 정도 시연해 보이면 거의 똑같이 따라할 수 있다.
문자로 기록된 거의 모든 지식매체를 학습한 오늘날의 AI 모델에, 스스로 걷고 뛰며 능동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휴머노이드 로봇이 결합한다면 세상은 어떤 모습이 될까. 지난달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컴퓨터 과학자 렉스 프리드먼의 팟캐스트에 출연해 밝힌 상상은 약간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미 도로 위의 테슬라 자동차 수백만대에서 실시간 비디오가 수집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는 수억~수십억대에 달하는 옵티머스가 현실 세계로부터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학습하게 될 것이다. 이 방대한 데이터는 궁극적으로 AI 모델을 훈련시키는 가장 거대한 원천(source)이 될 것이다. 테슬라 자동차는 도로 위에만 있지만, 옵티머스 로봇은 어디든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