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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던 것이 스러진 자리에서

입력 2024.09.03 21:23

수정 2024.09.03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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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한 지 보름 지난 첫 학기의 초가을날, 강의실에 들어가니 학생들이 조심스레 휴강에 관해 물었다. 다음주에 단과대 체육대회가 예정되어 있는데 큰 연례행사라 통상 그날은 수업을 안 한다는 것이었다. 생경한 교과목들의 강의 준비를 하루 쉴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려 해 칠판 쪽으로 몸을 돌렸다. 논다고 좋아서 선생의 입이 찢어진 걸 보면 학생들이 얼마나 당황할까 싶었다. “휴강해야 하는군요.” 난감함을 연기하느라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렸다. 한 성실한 복학생이 내가 진짜 아쉬워하는 줄 알고 의무는 아니라며 말문을 떼길래 다급히 “아녜요. 그날 쉬고 학기 말에 보강하죠” 외쳤다. 이내 본심을 들킨 게 부끄러워져 그 시간대에 경기 보러 가겠다고 약속했다.

한 주 지나 체육대회가 열렸다. 축구, 발야구, 이어달리기를 비롯해 윷놀이와 줄다리기까지 각종 시합이 토너먼트식으로 펼쳐졌다. 약속한 게 떠올라 오후에 운동장으로 나가봤다. 연둣빛 ‘과티’를 맞춰 입은 우리 학과 구성원들이 농구장 모퉁이에 배추포기처럼 모여 앉아 응원을 펼치고 있었다. 공 넣었을 때보다 점수 잃었을 때의 ‘괜찮아’ ‘잘했어’ 함성이 더 크길래 게임규칙을 잘 모르던 난 이긴 줄 착각하기도 했다. 축구경기를 하던 저편에선 어느 원로교수님이 어설픈 자세로 드리블 시범을 보이고 계셨고,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씨름선수로 출전해 스무 살 청년의 샅바를 잡았다. ‘무슨 중학교 운동회도 아니고’라며 시니컬한 척해봤지만, 어느새 마음은 보리차처럼 데워져 있었다.

유년기 이래 스포츠를 하는 것도 보는 것도 즐기지 않아 온 나는 함께하는 운동이 이렇듯 정겹고 유쾌할 수 있음을 그제야 경험했다. 시간이 흘러 풋것의 설렘이 휘발되고, 지치고 실망하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 내가 실망을 주기도 할 미래의 어느 날 꺼내어 볼 콩알만 한 기억이 지금 만들어진 것임을 예감했다.

몇주 전, 혼자 저녁 먹고 밀린 일 하러 돌아가던 길에 교내 운동장을 지났다. 이어폰 꽂고 어둑한 트랙을 터덜터덜 걷는데 누가 뒤에서 달려와 어깨를 톡톡 쳤다. 우리 학과생이었다. 올가을 개최될 단과대 체육대회를 앞두고 발야구 연습 중이랬다. 저편엔 다른 친구들도 모여 있었다. 저희끼리 “우리 하나, 둘, 셋!” 구호 붙여 “안녕하세요” 입을 모으더니 쿡 웃는 것이었다. 근래 유행하는 인사방식인 듯했다. 풋것의 설렘이 휘발된 9년차 선생이 되었음에도 어김없이 마음이 녹아내렸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묻자 손을 내저으며 연습을 마치고 저녁 먹으러 갈 참이라 했다. 잠시 이야기 나누다 “여름밤 잘 보내고…” 하고서 가던 길로 향했다. 열 발짝쯤 걷다 뒤돌아보니 몇몇이 여전히 이쪽을 보며 하얗게 웃고 있었다.

빔 벤더스 감독의 신작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은 날마다 출근길에 필름카메라를 챙겨 나와 나뭇잎 사이로 잠깐씩 비치는 햇빛, 고모레비(こもれび)를 렌즈에 담아낸다.

영화 보고 상영관을 나서며, 지인이 이야기했던 ‘반짝이는 것 안에 필연적으로 포함될 사라짐’에 관해 생각했다.

나눠 듣는 음악으로, 노동 후의 하이볼 한 잔으로, 스치는 눈인사로 반짝이던 한순간은 다시 나타날 때 매번 그전과 다른 밀도와 채도를 지닌 채 어른거린다. 생은 이렇듯 일순간 빛나던 것이 사라지고 또 다른 것이 나타나는 찰나의 연속일 테다.

분홍빛 블라우스와 남색 치마 입고 또각구두를 신은 채 강단에 섰던, 세 시간 연속강의를 마친 다음 커다란 초콜릿 바를 베어 물고 즐거워하던, 이 수업 재밌다고 학생들끼리 말하는 걸 엿듣고 빨갛게 달아오른 귓불을 머리카락으로 쏙 가린 채 계단을 달음질치던, 경어체를 쓰다 용기 내어 말 놓던 첫 순간들이 반짝이고 스러져간 삶의 자리에 서서, 2024년 늦여름 밤의 ‘고모레비’를 하나 더 만들어 가졌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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