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석의 ‘도발적 발제’

김태일 전 장안대 총장

임종석이 ‘두 개의 국가론’을 저렇게 내지른 배경이 뭘까? 지난 주말 논단은 온통 그의 표현대로, 임종석의 ‘도발적 발제’가 차지했다. “통일, 하지 맙시다”로 시작하는 그의 2024년 9·19 공동선언 6주년 기념사는 ‘통일’ 논의는 부질없으니 더 하지 말고, 지금부터는 ‘평화’에 대해서나 고민하자는 것이었다. 못할 말은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그리고 최근에 들어와서는 부쩍 자주 등장하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그가 왜, 지금, 저런 자리에서, 다짜고짜 얘기를 꺼내는 것인지는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임종석 자신의 설명은 이랬다. 북한이 올해 초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개의 국가’로 규정하고 대남사업기구 정리, 조국 통일 3대 원칙 폐지, 조국 통일 3대 헌장 기념탑 철거 등 ‘통일 지우기’를 하고 있고 남북이 맺은 모든 합의를 사실상 무효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통일 논의를 한다는 건 비현실적이라는 얘기였다. 그리고 통일에 대한 국민의 관심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특히 젊은 세대는 그런 성향이 심하여 통일에 대한 거부감까지 보이는 상황에서 통일을 얘기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의 설명이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 같다. 뭇 사람의 의구심은 급기야 임종석이 자기의 정치적 존재감을 보이려고 저런 발언을 전략적으로 한 것이 아닌가까지 이르고 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런 억측까지 나오는 건 이 ‘도발적 발제’가 얼마나 느닷없는 것이었는가를 보여준다.

남한과 북한이 서로의 국가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유엔에 남북이 동시에 가입을 하면서 국내외에 이미 확인한 바이다. 다만 남북한 기본 합의서에 따라 남과 북은 통일로 가는 과정에 있는 ‘과도적이고 특수한 관계’에 있다. 그동안 남북한은 국가성과 특수관계성이라는 이중규범을 바탕으로 평화적 현상 유지와 통일 미래 비전을 목표 가치로 천명해 왔다. 남북기본합의서는 그 후 모든 정부가 그 원칙을 남북관계의 준거로 삼았다. 불후의 6·15 남북공동선언, 특히 ‘남과 북은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라는 대목은 남북기본합의서 정신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었다.

‘두 개의 국가론’은 그런 역사적 의미가 있는 남북기본합의서 체제를 해체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바꾸려면 그것을 대체할 대안까지 마련해야 하고 사회적 합의를 모으는 숙의 공론도 필요하다.

임종석은 ‘두 개의 국가’ 체제를 만들기 위해 헌법 3조 영토 조항을 삭제하거나 개정하고 국가보안법도 폐지하고 통일부도 정리하고 우리 정부의 통일방안인 한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3단계 통일방안도 내려놓자고 했는데, 하나하나가 간단치 않은 문제이고 사회적 지지가 필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에 관한 입장 천명은 훨씬 더 조심스러운 전략적 고민이 있어야 했다.

‘통일’이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다는 문제는 이미 수십년 전에 학계에서나 시민사회에서 지적하고 있던 바다. ‘통일’보다는 ‘탈분단’이라는 개념을 쓰자는 주장도 있었고 성평등 운동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따로 또 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통일’이 아니라 ‘탈분단’이나 ‘따로 또 같이’라는 개념으로 현실을 보면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통일’이라는 말이 신성불가침이 아닌 것은 맞다. 그것이 남북관계의 현재와 미래를 설정하는 유일 개념일 필요도 없다. 하지만 임종석과 같은 영향력 있는 지도자가 이런 문제를 제기할 때는 훨씬 더 깊은 사려(prudence)가 필요하다. 새로운 냉전체제가 형성되고 있고 윤석열 정부의 대북 강경책이 위험한 지경이고, 북한은 사실상 핵무기를 가지고 있으며 ‘적대적 두 개의 국가’를 제도화하고 있는 현실에서 우리가 새로운 질서를 담는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렇게 ‘도발적 발제’를 하고 “건강한 토론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라는 식으로 던지는 방식은 그가 가지고 있는 책임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아쉽다.

이를 계기로 보수진영의 색깔 공세가 벌써부터 기승을 부리고 있으며 진보 진영은 내부적으로 어수선해지는 상황을 겪게 될 수도 있는데 문제를 차근차근 정리하는 지혜로움이 필요하겠다. ‘도발적 발제’가 던져주는 ‘건강한 토론’이 아니라 시민들의 자기 주도적 숙의로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찾아가는 공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김태일 전 장안대 총장

김태일 전 장안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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