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오전 8시50분. 서울역 5번 승강장에 특별한 열차가 한 대 들어섰다. 백두대간 소백산준령 끝자락에 있는 충북 영동을 향하는 ‘국악와인열차’다. 영동하면 떠오르는 국악과 와인을 소재로 만든 한국철도공사(코레일)의 대표적인 관광열차 상품이다.
좌석에는 영동산 샤인머스캣으로 만든 와인과 고급 와인잔, 간단한 간식거리가 준비되어있었다. 아침 9시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간, 와인을 마시며 창밖 풍경을 즐기다보니 어느새 국악 공연이 시작됐다. 전문 소리꾼들이 능숙하게 승객들의 호응을 유도하면서 열차의 열기를 한껏 달아올렸다.
3시간 남짓을 달려 영동역에 도착한 뒤엔 본격적인 와이너리투어가 시작됐다. 오리고기와 와인을 곁들인 점심식사를 한 뒤 영동에서 직접 생산된 와인을 시음하고, 영동군 대표 관광지인 레인보우힐링센터와 와인터널까지 방문하고 나서야 관광 코스가 끝이 났다. 열차 여행과 연계된 관광코스는 때에 따라 달라지는데, 탑승객이 직접 자신이 원하는 관광 일정을 짜는 것도 가능하다.
현재 국악와인열차는 승객의 80%가 60대 이상 여성일 정도로 중장년층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이번이 국악와인열차 두 번째 탑승이라는 민태자씨(72)는 “요즘 주위에서 차 없이 갈 수 있는 기차 여행이 열풍인데, 기차 내에서 각종 레크리에이션을 즐기며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상품은 국악와인열차가 유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만족도가 높아 다른 친구들과 함께 다시 방문했다”고 했다.
국악와인열차는 ‘소멸위기’에 놓인 영동군의 제안으로 처음 시작됐다. 한때 12만명이 넘는 인구가 4만명대로 줄어들자 ‘뭐든 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영동군 내에 팽배했다. 일자리를 만들어 이주를 유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관광을 활성화해 생활인구를 늘리자는 것이 군의 판단이었다.
2006년부터 와인열차, 와인인삼열차, 와인시네마열차 등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되던 관광열차는 2017년 내구 연한 만료로 폐차가 된 상황이었다. 관광객들의 방문 수요를 늘리는 것이 지상 과제였던 영동군은 코레일에 개발비용 20억원 남짓을 출자해 이를 ‘국악와인열차’라는 이름으로 재탄생시켰다.
2018년 2월 운행을 재개한 국악와인열차는 침체된 영동군 활기를 가져왔다. 영동군 관계자는 “기차 한 대가 올 때 마다 200명이 넘는 이들이 영동을 찾게 된다”며 “이들이 영동의 와인을 즐기고, 이후 집으로 돌아가 재구매를 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파급력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말했다.
지난 6월 기준 영동군의 디지털관광주민증 발급건수는 6만2000명으로, 주민등록인구(4만3000명)를 뛰어넘었다. 디지털관광주민증을 받은 이들에게는 34개 식당·관광시설 이용 시 군민에 준하는 할인 혜택이 주어진다. 국악와인열차가 일회적인 관광을 넘어 지방과의 지속적인 ‘관계맺음’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국악와인열차는 영동군을 넘어 전국으로 운행을 확대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운영하는 영동 와이너리투어와 부정기적으로 운영하는 타지역 상품을 모두 합치면 누적 이용객만 3만1636명에 달한다. 코로나로 운행을 멈췄던 2020년부터 2022년을 제외하면 매달 1000명이 훌쩍 넘는 승객들이 이 열차를 이용하고 있다. 매 회차마다 전석 매진(245석)일 정도로 인기가 좋다.
국악와인열차의 운임은 국악공연 등이 있는 이벤트칸이 16만9000원, 일반칸이 14만9000원이다. 코레일은 목적지가 인구감소지역일 경우 지난달 1일부터 철도운임의 50%를 할인해주고 있다. 이에 따라 할인된 운임은 이벤트칸이 15만4000원, 일반칸이 13만4000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