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노동소설
김미정 문학평론가-이서수 작가 대담
바야흐로 ‘노동소설’ 전성기다. 1970~1980년대 노동운동의 흐름과 맞물려, 운동의 지평에서 창작됐던 ‘노동소설’들의 전형을 떠올린다면 선뜻 수긍할 수 없는 말이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 “‘노동’의 주제를 환기시키는 작품은 빈번하게 등장했고, 서사의 스펙트럼도 넓어졌다”(김미정 문학평론가)라는 분석처럼 ‘노동소설’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1980년대 노동소설이 대공장, 정규직, 남성 노동자를 기본값으로 공동체(노조)를 통해 성장하고 단결하는 서사를 중심에 두었다면, 오늘날 소설에서는 비정규직·프리랜서·감정노동자·돌봄 노동자·플랫폼노동자 등 과거보다 훨씬 다양한 노동자들이 주체로 등장한다. 또 공동체 중심 서사보다는 노동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개인들, 일을 하면서 마주치는 심리적·정서적 균열 등 “노동과 관련한 개인의 경험과 감정을 중심에 둔 서사”(이서수 소설가)가 주를 이룬다. 이처럼 다양한 노동소설의 등장은 오늘날의 노동의 문제에 많은 독자들이 공명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지속되는 혹은 더 강고해진 구조적 모순을 방증하기도 한다.
경향신문은 창간기획으로 과거와는 다른 오늘날의 ‘노동소설’의 현황과 특징을 조명하고, 불안정 노동과 불평등이 강화되고 노동소득의 가치가 추락하는 오늘날, 문학이 제시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모색해보는 대담을 마련했다.
김미정 문학평론가는 <움직이는 별자리들> <민중이 사라진 시대의 문학>(공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공저) 등을 펴냈고, 최근 ‘질문을 바꾸면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노동-자본의 뫼비우스 띠와 2010년대 후반 한국소설의 일 노동’ 등의 저술을 통해 오늘날의 노동 현실과 이를 반영하는 한국소설을 심도 있게 조명해 왔다. 이서수 작가는 2014년 단편소설 ‘구제, 빈티지 혹은 구원’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젊은 근희의 행진> <헬프 미 시스터> 등의 작품에서 한국 사회 노동 현실을 세밀하게 그려왔다. 동시대 한국 사회의 노동 현실을 다루는 월급 사실주의 동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대담은 지난 달 4일 경향신문사에서 진행됐다.
-1980년대에는 ‘노동소설’이 하나의 장르처럼 인식됐는데요. 오늘날에는 이 명칭을 낯설게 여기는 독자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과거의 ‘노동소설’과 오늘날의 ‘노동소설’을 같다고 볼 수 있을까요.
김미정=“과거 노동소설은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와 연결돼 있었죠. 한국 근현대 시기 노동은 희생과 억압의 대상이었고, 노동운동은 이에 맞서 저항과 투쟁을 이어왔습니다. 한국에서의 노동 문학, 노동소설은 그 과정과 느슨하게 연대하면서 같이 갔습니다. 그때의 노동자는 정치, 사회적인 변혁의 주체로 기대받았고, 작가 역시 그와 행보를 함께 했지요.”
이서수=“그런 측면에서 저는 ‘노동소설’ 명칭이 시대와 불화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 또한 ‘노동소설’을 쓰는 작가로도 알려졌지만, 과연 내가 쓴 소설이 ‘노동소설’의 전형에 맞는지 검열할 때가 있습니다. ‘노동소설’이라고 하면 ‘기업과 노조의 대립’ 같은 공동체 중심 서사나 반신자유주의 담론을 다룬 작품들을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반면 지금 나오는 소설들은 그보다는 노동과 관련한 개인의 경험과 감정을 중심에 둔 서사가 많아요. 과거에는 노동자의 이미지가 집단으로 그려졌다면, 이제는 거대한 기업 앞에 왜소해진 개인으로 노동자가 먼저 떠오릅니다. 과거에는 작가가 앞장서서 이야기하는 존재였다면 지금은 작가도 수많은 개인 중 한 명으로 자리가 바뀌었다고 느끼고요. 또 과거에는 특정 집단이 주로 노동소설을 향유했다면 지금은 독자 폭이 훨씬 넓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같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노동소설’하면 과거의 전형을 떠올리게 돼 이 명칭이 시대와 안 맞는 측면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김미정=“말씀하셨듯, 과거의 노동소설과 달라진 점들 때문에 저는 ‘노동을 서사화한 소설’이라고 느슨하게 표현하는 편이에요. 지금 노동을 다룬 소설은 과거보다 훨씬 다양한 특이성과 주체성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과거 노동의 표상은 정규직, 대공장, 남성이 기본값이었고 노동소설도 이 같은 사회상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았죠. 그러나 2010년대 중반 이후 나온 소설들을 훑어보면 정말 다양해요. 서비스 감정노동자의 굴욕적 일상(황정은 ‘복경’), 사무직 비정규직의 삶(김금희 ‘조중균의 세계’), 알바생과 중간관리자의 갈등(장강명, ‘알바생 자르기’), 바이럴 마케팅 종사자의 죄책감(김세희, ‘가만한 나날’), IT스타트업 사무실의 풍경(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신뢰해온 회사에 배신당한 노동자(김혜진, <9번의 일>), 시스템이 만든 노동의 분할과 적대들(조해진, ‘경계선 사이로’), 교육 현장 고학력 여성들의 생존기(서수진, <코리안 티처>) 등 나열하기도 벅찰 정도의 다양한 소설들이 등장했죠. 다만 저는 그렇다고 ‘노동소설’이라는 말을 버리거나 과거와 단절적으로 논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노동소설이 특정 노동에 집중된 측면이 있었지만, 인간과 노동이 맺는 의미와 가치를 그처럼 고민했던 시대도 또 없었던 것 같아요. 여전히 신자유주의 혹은 자본주의로 인한 노동의 문제는 변함없이 혹은 강고하게 진행 중이라는 점에서 당대의 고민을 이어받아 지금 관점에서 재구성해 봐도 좋지 않나 생각합니다.”
-노동소설이 변화하고 스펙트럼이 다양하게 변한 시점이나 계기가 있을까요.
김미정=“아시다시피 1997년 IMF를 기점으로 한국 사회가 신자유주의로 전환하고 노동의 형태 또한 달라졌죠. 저는 신자유주의라는 큰 이야기를 사람들이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 시점을 2000년대 중후반으로 봅니다. 예컨대 2006년 11월 비정규직보호법이 통과됐는데, 이로써 비정규직이라는 유동적 노동이 오늘날 일반적인 노동 형태로 공식화된 셈이죠. 그래서 우선 저는 2000년대 초중반 나온 소설들에 주목하고 싶은데요. 제가 느낀 당시 소설들의 공통된 특징은 부당하거나 모순된 상황에서도 인물들이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그 대신 유머로 승화하거나 속으로 삼키는 불안하고 기묘한 낙관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요. 즐겁게 읽으면서도, 그 사이에 뭔가 지워지는 것들이 있는 것 같다는 석연치 않은 느낌이 있었습니다. 신자유주의라는, 아직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시대적 상황과 세기 초, IMF를 극복했다는 착각 등이 맞물려 사회적으로 그런 낙관적 정서가 있었고, 소설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반영되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러다가 2006년 중후반 화내는 소설도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것들이 불안정 노동을 상시화하고 불평등을 강화하는 신자유주의의 정체나 기원을 사람들이 피부로 알아차리기 시작한 것과 무관치 않다고 봅니다. 노동에 대해서도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환기하기 시작했고요.”
이서수=“말씀하신 대로 신자유주의를 피부로 느끼기 시작하고 10년이 지난 후인 2010년대 중후반 즈음에 다양한 노동소설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습니다. 그 배경에는 짙은 피로감이라는 공통의 감각이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해?’ ‘노동이 정말 이런 걸까’라는 물음을 다수가 하고 있어요. 다만 과거에는 이 같은 물음이 노동자의 권리 향상을 향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그저 안으로 꾹꾹 눌러 담으며 사는 거 같아요. 과거 노동소설이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장르처럼 여겨졌다면 지금의 노동소설은 해결책이나 전망을 제시하기보다는 우리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노동을, 핍진하게 드러내는 서사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죠. 저는 김 선생님이 과거 노동 문학과 단절되지 않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말씀에 동의하는데요. 작가 또한 이 시대, 이 체제를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왜소해진 개인으로서의 노동자의 이미지를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과거와의 연결성을 통해서 작가의 시선을 지금으로부터 옮겨보면 또 다른 모색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과거 ‘집단’으로 인식된 노동자
거대 기업 앞 왜소한 ‘개인’ 변모
‘정치적 메시지’ 담던 장르에서
핍진한 삶의 모습 품은 서사로
김미정=“기존의 노동 표상으로 환원되지 않은 무수한 정념과 문제의식이 소설에 등장하는 것은 고무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이면에 작동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핵심은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죠. 노동의 문제가 늘 자본의 구조와 연동됐지만, 지금은 이에 관한 이야기를 시대착오적인 거대담론으로 생각하고 기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제가 단절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저는 이 작가님의 ‘미조의 시대’를 그런 맥락으로 읽었어요. 등장인물 수영이 구로디지털단지의 한 웹툰 회사에서 가학적인 성인용 웹툰을 그리는 노동을 하면서 고통스러워하잖아요. 그러다가 과거 1970~1980년대 구로공단에서 가발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의 사진을 보게 되죠. 세련되게 외피는 변해 눈속임하고 있지만, 그 근간에서 근본적으로는 변하지 않는 부분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아요.”
이서수=“다른 직종에서도 ‘수영’ 같은 괴로움을 느끼는 노동자들이 매우 많을 거 같아요. 저는 노동자 하면 ‘거대한 기업 앞의 개인’이 항상 떠오르는데, 그 상태로 삶을 이끌고 가는 게 너무 고통스러운 것 같아요. 여기서 좀 벗어나기 위해서 연결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고, 제가 가져온 게 과거의 노동자와 연결돼 있다는 거였어요. ‘수영’이 과거 속에 연결성을 찾으면서 더는 자신을 미워하지 않게 됐다고 이야기해요. 과거부터 지금까지 고통스러운 노동이 이어져 왔다는 사실은 너무 슬프지만, 그러면서도 ‘수영’이 왜소해진 개인이 아니라 어떤 일원으로 연결성을 느끼면서 절망을 넘어설 수 있는 거죠.”
김미정=“그 연결감이 굉장히 힘을 주는 것 같아요.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발밑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느냐는 생각을 하는 게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작품을 하나 더 꼽자면 조해진 작가의 ‘하나의 숨’도 그런 연결성을 이야기한 작품인데요. ‘하나의 숨’은 청소년 취업과 산업재해를 다룬 소설이에요. 계약서에 명기된 노동의 기한이 곧 관계의 유통 기한이 되는 시대인데, 이 작품은 이를 잘 포착하고 있죠. 그러면서도 계약서와 무관하게 이 존재들끼리 연결되는 또 다른 명백한 조건들이 소설에서는 기어이 발견됩니다. 공기를 구획하여 가를 수 없듯, 우리가 서로 내쉬는 숨도, 사람 사이의 정서·정동적 관계도 자르거나 가둘 수 없다는 거죠.”
-2010년 후반에 들어 두드러진 것 중 하나는 노동소득의 가치가 추락하고 주식·코인·부동산 등 금융소득에 대한 기대가 커진 건데요. 여러 소설에서 이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돼 있고, 불안정하고 차별적인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로 금융소득이 그려진 소설(<달까지 가자>, 장류진)도 나와 화제가 됐었죠.
이서수=“시대 감각에 예민한 작가분들이 있죠. 시대를 포착해서 소설로 남기는 것은 기록으로서도 굉장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분열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해요. 근면성실하게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세계관이 무너진 건 맞는 것 같아요. 그러나 여전히 그게 유일한 진리 같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거대한 고대의 건축물이 붕괴되는 소리는 들리는데, 먼지구름에 휩싸여 정말로 무너졌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는 상황 같은 거죠. 그러다 보니 계속 노동에 대해 분열적이고 양가적인 의미를 오가게 되는 거예요.”
김미정=“평생 고용의 신화가 좌절되고 삶 자체가 불안정해지면서 분열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는 데 공감해요. 오늘날의 소설들을 보면 일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려는 인물, 일과 자아를 능수능란하게 분리하는 인물도 나오죠. 최근 프랑스 사회학자 미셸 페어의 <피투자자의 시간>을 흥미롭게 읽었는데요. 오늘날 자신을 노동하는 주체로 생각하지 않고 투자하는 주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저자는 이를 만들어지는 투자자, ‘피투자자’라고 말하는데, 이를 비관만 하지 말고 그 피투자자라는 주체성을 활용해서 세계를 바꿀 계기를 발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금융소득에 대한 열망은 사실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탈노동’의 감각과도 연결됩니다. 이 ‘탈노동’의 감각을 조금 비틀면 다른 것을 상상하고 이야기하는 소설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 ‘탈노동’은 ‘기본소득’ ‘커먼즈(공동의 자원)’나 ‘노동거부’와도 연결될 수 있거든요. 노동의 가치가 추락하고, 부당한 노동을 하고 있다는 감각이 노동 거부, 일종의 자본주의 파업 선언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거죠. 실제 1960~1970년대 서구에서의 가사노동 임금투쟁도 그렇게 해서 오늘날의 가사, 간병, 돌봄 등 재생산 영역의 가치를 확인시킨 거고요. 그런 사회학적인 상상력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더라도 문학이고 또 픽션이니까 상상력을 밀어붙여 그려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전에 없던 노동의 형태가 빠르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노동을 다룬 소설들도 많이 등장하는데요. 이서수 작가님의 장편 <헬프 미 시스터>도 플랫폼 노동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어떻게 쓰시게 됐는지요.
이서수=“실제로 배송일을 하면서 이 일을 장편으로 써봐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당시만 해도 ‘플랫폼 노동’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 단어를 찾지 못해 화가 났던 순간들이 많았어요. 나를 개인사업자라고 하지만, 지시는 기업에서 다 내려왔고,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불이익이 있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개인사업자라고 하니 화가 나더라고요. ‘플랫폼 노동’이라는 용어를 찾고 너무 기뻐서 쓴 책이에요. 노동의 형태는 빨리 변하는데 이를 규정하는 명칭조차도 너무 늦게 도착하는 것 같아요.”
김미정=“<헬프 미 시스터>는 단연 2022년의 삶과 노동의 최전선이 서사화된 작품이죠. 소설 속 인물들은 다양한 플랫폼 앞에서 상시 대기하다가 일시적이고 유동적인 일의 현장에 투입됩니다. 서로 늘 연결돼 있지만, 실상은 지극히 파편화돼 있어서 같은 일을 한다는 동질감조차 느끼지 못하죠. 여기에서 노동자, 자본가, 소비자 식의 구획된 정체성은 쉽게 무화되고요. 말씀하신 대로 플랫폼 노동자는 법적으로는 자기사업자이지만 실제로는 고된 작업 현장의 노동자라는 분열적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은 사람들끼리의 연결을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당사자 자신마저 분열시키죠. 그런 시대의 조건이 고도로 세련되게 집약된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서수=“소설에는 자동차로 택배 배달을 하는 카플렉스 부부가 나와요. 얼마 전 여름에 비가 많이 왔을 때, 카플렉스 하시던 분이 물건을 배송하시다가 돌아가셨잖아요. 비가 그렇게 쏟아지고 물이 범람하는데도 배송하러 가셨던 마음을 저는 알겠더라고요. 댓글에서는 그 정도로 비가 오면 돌아와야 하지 않냐고도 하는데, 저는 막상 그 노동 조건에 처해 있으면 그렇게 되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자신을 위한 선택을 내리기가 어려운 구조적 문제점이 있기 때문이죠.”
금융소득 열망, 투자하는 주체를
‘탈노동’ 연결해 상상해본다면?
늙음·죽음·장애·약함 같은
‘일 못하는 몸’ 긍정하는 시도 기대
-김미정 선생님은 한 평론에서 과거에는 직접적으로 착취하고 수탈하는 자본의 성격이 두드러졌다면 오늘날의 자본은 “교묘하고 부드러운 전제를 행한다”고 분석하신 바 있는데요. ‘각자도생’이 시대정신처럼 여겨지고, 노동이 능력주의로 환원되는 오늘날, 문학에서 이 같은 모순에 대항하고 희망을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오늘날 소설이 이를 어떻게 그려내고 있다고 보시는지요.
이서수=“쓰면서 늘 고민하는 지점인데 여전히 개인적 단위에 머무르고 있다는 생각이에요. 실제 노동 현장에서 그러하듯, 저도 그렇고 다수의 소설이 구조적 변화를 적극적으로 촉구하기보다 개인의 일탈이라든지 그와 비슷한 결심, 서로에 대한 돌봄, 연결성 같은 것으로 자본에 대응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죠. 어떤 희망이나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하지만, 저 또한 이 체제 안에 갇혀 예술을 하기 때문에 이를 찾기가 쉽지 않아요. 그렇다고 현실의 핍진한 모습을 보여주기만 하는 건 파편화된 리얼(real), 이즘(-ism)이 붙을 수 없는 모습이라고 생각하고요. 이즘이 붙으려면 거기서 좀 더 나아가는 어떤 지점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한편에서는 소설을 쓸 때 또 다른 심리적 걸림돌이 있기도 해요. 작가로서 나는 이런 고민을 하는데, 다른 쪽에서는 사람들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는거죠. 능력주의 담론 같은 건데, 마치 노동을 어떤 자세로 대할 것인지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실제로 그런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드물잖아요. 예컨대 ‘투자자’ 정체성은 내 삶에 직접적으로 들어올 수 있는 단어가 아님에도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솔깃하면서, ‘내 마음가짐만 ‘투자자’로 바꾸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함정 같은 것에 빠지는 거죠. 그런 의견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작가로서 이 같은 사회 분위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기도 해요.”
김미정=“노동을 둘러싼 불평등 구조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알고 있고, 여기에 대한 감각을 표출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자본주의 시스템이 압도적이다 보니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냥 시스템대로 어쩔 수 없이 살아가게 되고, 소설도 관점을 제시하기보다 객관적으로 이런 현실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어요. 또 어떤 소설들에서는 판단하지 않으려는 서술 위치도 강하게 느껴지는데 이 또한 재현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들을 의식하며 소설 속 세계보다 더 직접적으로 체감되는 이 세계의 회로가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하는 게 작가들의 고충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러나 의도치 않게 이런 독자에게 맡긴 해석의 몫이 결과적으로 소설 바깥의 많은 혐오와 교착해버리는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작가가 믿는 더 나은 세계에 대한 힌트, 약간의 실마리를 주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읽고 나면, 독자들과 함께 세상을 만들어 간다는 느낌으로 고무되는 소설들이 있거든요. 그런 소설을 읽으면 힘이 나고 내가 사람들과 이렇게 연결이 되어서 같이 간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작가님이 쓰시고 싶은 노동소설이 있다면, 또 평론가님이 나오길 기대하는 노동소설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이서수=“저는 아직 제가 본격적으로 노동소설을 쓰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제가 진짜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산재에 관한 소설을 항상 쓰고 싶었어요.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있고 한 권이 아닌 시리즈로 쓰고 싶어요. 그런데 이게 독자들이 받아들이기에 너무 무겁고 회피하고 싶은 이야기일 것 같아서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자료조사도 많이 하고 기사도 늘 보지만, 마음속에 걸리는 건 그 노동을 제가 경험해보지 않았다는 것이에요. 언젠가 그 현장으로 가야 하는데 지금은 잠시 정류장 같은 데 앉아 있는 느낌이죠. 독자가 읽고 싶게 만들고 이를 경험한 것처럼 느끼게 하려면 제가 그 노동을 경험해봐야 할 거 같아요.”
김미정=“이서수 작가님의 소설이 너무 기대됩니다. 저는 우선 사라지는 직업들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하고 싶은 건 ‘일할 수 없는 몸’ 자체를 긍정하고 상상하는 장이 좀 더 펼쳐지면 좋겠어요. 우리가 노동을 삶의 중심으로 여기게 된 게 특히 근대 이후잖아요. 이탈리아의 이론가 실비아 페데리치는 ‘생산적인 노동자가 되는 것은 일말의 행운이 아니라 불운이다’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통쾌한 말이라고 생각해요. 10년 넘게 투병하고 계신 분의 소망에 대해 전해 들은 일이 있는데요. 아프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다는 거예요. 일해야만 쓸모 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감각 같은 게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있죠. 아프면 아픈 대로 일 안 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긍정할 수 없는 세계는 불행하지 않나요. ‘일할 수 없는 몸’은 단지 아픈 몸만이 아니에요. 다양한 이유에서 일하지 못하는 상황이 있는데, 당사자가 자기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상상 자체가 지금 막혀 있다고 봅니다. 앞서 말한 노동 거부의 상상도 이런 맥락에 있을 거고요. 늙음, 소멸, 죽음, 장애, 약함 이런 것 자체가 긍정될 수 있고, ‘일할 수 없는 상태’ 자체를 긍정하는 방식의 이야기들이 좀 더 나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