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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 보호의 결말

가을이 깊어지면서, 왕의 일정도 덩달아 바빠졌다. 왕이 직접 선대 왕의 능을 찾아 제사 지내는 행차 때문인데, 조선의 22번째 왕인 정조에게는 제사 지내야 할 능도 많았다. 정조는 능행차를 통해 자기 왕통의 정당성과 권위를 백성들에게 드러내고 싶어 했다. 빠듯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왕의 권위가 드러날 정도의 대가(大駕) 행렬을 만들려 했던 정조로 인해, 왕을 시위해야 하는 문무 관료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1785년 음력 9월4일은 가까운 창릉과 명릉, 서칠릉, 경릉, 홍릉을 하루 만에 돌아야 하는 일정이었다.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속도감 있는 행차가 이루어져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시위부대뿐 아니라 수행하는 신료들과 각 관서의 하급 관료들까지 어느 하나 어긋남이 없어야 했다. 그런데 이 바쁜 일정이 출발부터 삐걱거렸다. 왕의 행차가 궁을 나와 모화관에 이르렀을 때 형조 소속 하급 관리들이 떼지어 왕의 대가 행렬을 침범했다. 대가 뒤쪽의 계속되는 소란에 정조는 결국 진노했다. 시쳇말로 ‘각 잡힌 대가 행렬’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상황이 한심했기 때문이다.

허락받지 않은 자들의 난입을 막지 못한 좌우의 두 의금부 도사는 자신이 속한 의금부에 하옥되었다. 또한 형조 소속 관리들을 단속하지 않은 형조 낭관들도 같은 처벌을 받았고, 형조 소속 당상관들은 모두 파직되었다. 형조를 책임졌던 형조판서 역시 무사할 수 없었다. 소속 하급 관리 몇명이 대가 행렬을 침범한 대가치고는 가혹한 처벌이었다. 그러나 왕의 법을 집행하는 형조조차 법도를 지키지 않고 대가 행렬 앞에서 거리낌 없이 행동한 사실에 대해 정조 역시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질서를 잡아야 할 자들이 질서를 무너뜨렸으니, 어떤 벌도 과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형조 소속 하급 관리들이 대가 행렬을 침범한 이유도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이유 역시 어처구니없었다. 백성들 입장에서 왕의 대가 행렬은 왕에게 직접 민원을 제기할 수 있는 기회였다. 특히 상소를 올리는 게 불가능했던 일반 양민들은 대가 행렬을 막고 꽹과리나 북을 쳐서 자신의 억울함을 왕에게 직접 알렸다. 격쟁(擊錚)이라 불리는 제도였다. 누군가 대가를 막고 격쟁을 하면 형조에서는 국왕의 귀를 시끄럽게 한 죄를 물어 의례적으로 곤장을 친 후, 억울한 사정을 진술한 기회를 주었다. 이렇게 받은 진술은 3일 이내에 반드시 왕에게 전달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직접 왕에게 올리는 호소이므로, 격쟁이 가능한 사안 자체는 매우 제한되어 있었지만, 그럼에도 백성들이 자기 억울함을 최고 권력자에게 토로할 수 있는 합법적 통로였다.

격쟁의 소관 부서는 형조였다. 물론 그 업무는 격쟁이 일어난 이후부터다. 대가 행렬이 있으면 형조 하급 관리들이 대가 주위에 포진하는 이유였다. 그런데 이날 형조 하급 관리들의 포진 이유는 달랐다. 그들은 대가 주위에서 격쟁하기 위해 다가오는 이들을 색출하고, 격쟁을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하루에 많은 능을 돌아야 하는 왕의 일정도 살피는 동시에 ‘각 잡힌 대가 행렬’을 바라는 왕의 심기를 보호해야 했기 때문이다. 형조 하급 관리들의 대가 행렬 침범은 그 과정에서 일어난 실수였다(노상추, <노상추일기>).

격쟁은 하라고 열려 있는 제도이고, 형조는 그것을 처리하기 위한 관서이지 막아야 하는 관서가 아니었다. 격쟁 자체가 워낙 억울한 사안들이 많다 보니, 왕의 기분이 좋을 일이야 없겠지만, 그렇다고 이를 막는 게 형조의 소관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왕의 심기 보호를 위해 자신들의 업무 범위를 넘어서면서, 그들 스스로 넘지 말아야 할 선도 함께 넘어 버렸다. 원래 권력자의 심기만 보호하다 보면 합법과 불법을 넘나들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자신은 물론 권력자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많은 역사의 가르침이 그러하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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