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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라는 빨간 약

[김범준의 옆집물리학]과학이라는 빨간 약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인간은 자신의 삶에 절대적으로 무관심한 우주의 거대한 침묵 속에 둘러싸인 고독한 자신을 발견한다.” 과학자이자 철학자로서 큰 자취를 남긴 파스칼의 말이다. 우주나, 지구나, 숲이나, 탄소 배출로 기온이 계속 오르는 지구의 대기나, 인간에게 쥐뿔도 관심 없다. 삶의 의미를 찾고자 발버둥치는 인간에게 우주는 아무런 답도 들려주지 않는다.

다른 우주도 있다. 이 우주의 한가운데에는 지구가 있고, 밤하늘을 가득 채운 반짝이는 뭇별은 우리를 중심으로 돈다. 땅을 적시는 비는 풍성한 수확을 위한 자연의 선물이고, 더운 여름 땀 흘린 농부를 위해 나무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운다. 아이가 착한 일 하면 산타 할아버지 선물을 받고 어른이 착하게 살면 다음 생에서 더 큰 보답으로 돌아온다. 이 우주는, 인간의 삶이 전 우주적인 의미가 있다고 끊임없이 우리 귀에 속삭인다. 큰 시련이 닥쳐 정말 힘들어도 이 또한 우주가 품은 원대한 계획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그나마 버텨낼 수 있다. 우주와 인간은 한 몸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빨간 약을 택하면, 자신이 배양액으로 꽉 찬 통 안에서 기계가 튜브로 공급하는 에너지로 끔찍한 삶을 이어가고 있으며 먹고 숨 쉬고 느끼는 모든 것은 기계가 자신의 뇌에 주입하는 전기신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파란 약을 선택하면, 이런 끔찍한 진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지금까지처럼 계속 안온하게 아무런 고민 없이 통 속의 삶을 이어갈 수 있다.

마음 편한 거짓과 끔찍한 진실 중, 네오는 빨간 약을 선택하고 황폐한 진실의 사막에서 태어나 처음 자신의 눈을 뜬다. 빨간 약, 파란 약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는 각자에게 달렸지만 두 선택은 엄연히 다르다. 빨간 약의 효과는 영속적이고 파란 약은 선택을 유예하는 선택일 뿐이다. 진실에 눈뜬 자는 아무리 눈을 질끈 감아도 한번 깨달은 진실을 결코 외면할 수 없다. 빨간 약을 고르면 선택을 무를 수 없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은커녕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별 주위를 도는 평범한 행성일 뿐이고, 인간은 이 작고 사소한 행성에서 기나긴 진화의 과정 중 우연히 등장한 생명종일 뿐이다.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해서 내가 착하게 살았기 때문이 아니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아무 죄 없는 사람에게도 나쁜 일이 우연히 생길 수 있다. 모두, 과학이 들려주는 명백한 진실이다. 침묵하는 우주와 의미로 충만한 우주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은 <매트릭스>의 빨간 약, 파란 약의 선택을 닮았다. 우주의 거대한 침묵 앞에서 고독으로 몸서리치며 잠 못 드는 이는 빨간 약을 택한 자다. 내게 과학은 아주 새빨간 빨간 약이다.

과학이라는 빨간 약을 한 움큼 삼키고 나서 눈을 뜨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점점 시야가 또렷해지면 그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우주는 쥐뿔도 내게 관심 없고 거대한 침묵을 영원히 이어가지만, 그렇다고 내 삶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찰나의 순간만 존재하는 인간,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티끌같이 작은 인간을 생각하며, 눈물겹게 외롭고 가련한, 그래서 더욱 소중한 인간을 아울러 떠올린다. 구별할 수 없는 똑같은 원자가 내 몸과 세상 모든 것을 만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몸이 내게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 것도 마찬가지다. 내 몸을 이루는 원자가 특별한 유일한 이유는 내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며, 우리 각자는 원자들의 모임이지만 원자들의 모임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주와 자연은 인간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지만, 그래도 바로 지금 이곳이 내가 살아가는 시공간의 한 점이다. 이 우주와 지구가 내게 특별한 이유는 내가 그 안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는 내가 없어도 우주지만, 그래도 이 우주는 내 우주다.

우주와 자연은 인간에게 침묵한다.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은 그 자체로 존재할 뿐, 내게 경이감과 아름다움을 선물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의미는 우주가 주는 선물이 아니라 각자의 노력으로 스스로 힘들게 찾아내야 하는 어떤 것이다. 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여도 난 여전히 마음 편한 거짓 믿음보다 불편한 진실을 택하련다. 이제 가을이다. 빨간 약 한 움큼 삼킨 내가 눈 들어 바라본 파란 가을 하늘과 울긋불긋 단풍은 여전히 눈부시다. 우주는 침묵하고 삶은 아름답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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