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은 어느 분의 조문을 가는 길에 들었다. 아름답고 슬프고 기쁘고 짠한 저녁이었다. 아침에 나는 앤 카슨에 대한 짧은 글을 쓴 참이었다. 앤 카슨이 노벨문학상을 받으면 실리게 될 글을. 한강 수상 소식을 들은 이들이 내게 축하 문자를 보낸다. 그들은 내 생각이 났다고 말한다. 그냥.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 말하는 게 이렇게 좋구나.
스웨덴 한림원에서는 선정 이유에 대해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는 동시에 인간 생명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했다. ‘맞서다’(confront) ‘연약함’(fragility) 그리고 ‘시적인’(poetic) 이 세 단어가 나를 사로잡았다. 광주와 제주라는 역사적 상처, 상실이라는 개인의 상처가 있었다. 있다. 저마다, 있을 것이다.
한강은 응시하는 사람이다. 어떤 일로 난감하던 어느 날, 한강은 고요하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작품에 집중해야지요. 글을 쓸래요.” 소음에 휘둘리지 않고 작은 생채기에 마음 다치지 않고 글로 돌아가는 그 곧고 단단한 자세가 내게도 힘이 되던 겨울날을 기억한다.
우리 역사가 남긴 큰 상처를, 그 질곡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이 쉬울 리 없다. 고통을 들여다보는 일은 고통스럽다. 글을 쓰는 안팎의 환경이 쉬웠을 리도 없다.
‘소년이 온다’가 2016년,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사실은 다 아는 일이다. 작가는 무슨 힘으로 어려운 시절, 계속 글을 썼을까? 훼절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들을 진득이 응시하는 그녀는 말을 하는 가능성 자체에도 마음을 앓는 사람인데. “나에게 혀와 입술이 있다 // 그걸 견디기 어려울 때가 있다”(시, ‘해부극장 2’)처럼 견디기 어려운 혀와 입술을 견딘 끝에 만들어지는 한강의 문체는 몸속에 고인 것들을 말리면서 나오는 진혼곡에 가깝다. 나는 그 시간의 깊이를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생명의 연약함’은 한강이 초기 시부터 보여준 작고 여린 것들을 향한 시선에서 확인된다. 소설을 구상하고 역사적 사료를 뒤지며 인간의 잔혹과 인간의 존엄 사이에서 작가는 쓰라리게 아픈 마음과 몸을 함께 앓는다. 지독한 내면의 투쟁이다. 그렇게 한 문장 한 문장 기억의 파편들을 아프게 새기는 그를 두고 실험적인 문체라고 할 때, 정작 그런 실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일관되게 작고 여린 것들, 연약함을 품는 여여(如如)함이다.
한림원이 실험적인 문체로 현대 산문의 혁신적인 면을 열었다고 할 때, 작가로서 한강의 시작이 시인이었음을 떠올린다. 시로 출발한 걸음, 여전히 시처럼 소설을 짓는 시간. 시의 어원인 포이에시스(poiesis)는 ‘만드는 일’이므로, 소설가 한강의 시적인 문체는 조각난 기억들과 역사의 흩어진 파편들을 모아 잇고 여미는 언어에서 나온다. 우리의 죽은 자들을, 이름도 없이 묻힌 자들을 지금 여기의 공간에 가만히 불러 모아 그 연약함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는 집중된 힘, 신비로운 수공(手工)이다.
한강이 직접 고른 시 10편을 번역하던 작년 여름, 한강과 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이 기억난다. 창이 환한 서촌의 한 찻집에 앉아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의 연결에 대한 독특한 인식을 이야기하던 우리. 그때 나는 2020년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 루이즈 글릭의 시를 번역하고 있었는데, 글릭과 여러 면에서 영혼의 결이 꼭 닮은 것 같다는 말을 했더랬다. 글릭의 어머니는 아기 루이즈를 낳기 전에, 한강의 어머니는 강을 낳기 전에 아기를 떠나보낸 상처가 있다.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은 엄마를 둔 두 작가. 죽음 이후에 잉태된 두 생명.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은 엄마를 둔 작가. ‘두 분은 만난 적도 없는데 통해요’ 하니 한강은 ‘그런가요’ 했다. 그날 우리는 글릭의 시와 한강의 시를 나란히 낮은 소리로 읽었다. 글릭이 시에서 시작해 시의 길만 걸었다면, 한강은 시에서 시작하여 소설의 세계로 확장해 나간다. ‘시적인 산문’으로 통칭된 문체의 실험은 어긋난 역사를 다시 쓰고 거대한 폭력에 스러진 이들을 불러 모아 그 뼈들을 다시 수습하는 글쓰기였다.
작년 가을, 학교에 한강을 초대하여 글쓰기 작업 이야기를 들은 일도 떠오른다. 또렷한 아이들이 쉼 없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100명이 넘게 큰 강의실을 꽉 메운 학생들이 모두 한강의 작품을 다 읽었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작가가 무심코 말했다. ‘학교에 나무가 더 있으면 아이들이 더 행복할 텐데요.’ 그래, 마음이 시끄러울 때는 푸른빛을 보는 게 좋지.
노벨문학상은 어떻게 오는가. 노벨문학상은 노벨문학상을 타려고 온 국민이 응원하고 작가가 안간힘으로 기다릴 때 오는 것이 아니다. 노벨문학상은 오늘처럼 온다. 조용하고 거대하게. 소리 없는 함성처럼. 모든 찌꺼기를 씻어가는 파도처럼. 아무 기다림 없던 저녁에, 그러나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던 것으로서. 폭력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연약한 생명들을 보듬고 헤아리는 한강의 ‘글-짓기’는 나날이 무너지는 이 세계의 반짝이는 반딧불 같아서, 그 반딧불을 발견하는 사람-번역가가 거기 혹해서 다른 언어의 옷을 입힌다.
노벨문학상으로 한강의 글이 더 널리 읽히게 될 거라서, 다른 세계에서도 짓눌려 우는 이들을 더 안아주게 될 것 같아서, 나는 그런 이유로 이 상이 반갑고 좋기만 하다. 한강 문체의 비밀은 이 세상이 품은 어둠과 폭력에 지지 않고 고요하고 뜨겁게 나아가는 사랑과 인내다.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다른 이들에게 전염되면 좋겠기에, 연약한 것들의 잦아진 숨결을, 그 흔적을 찾아 세심히 더듬는 그 글쓰기가, 그 집중이 평범한 우리에게도 전이되어 사랑과 인내가 많아지면 좋겠기에, 한강의 수상을 마음껏 축하한다. 그가 글을 쓰는 시간, 공동의 기억을 더듬는 그 고적한 시간을, 아이와 저녁을 먹고 음악을 이야기하고 차를 마시는 시간을, 작품을 구상하며 자박자박 걷는 일상의 걸음도.
AI가 시를 쓸 수 있는 시절에 무슨 문학이냐며, 언어교육도, 문학도 끝났다고 쉽게들 말한다. 무덤 위에서 바람이 햇살이 어떻게 꽃을 피워내는지 이야기하지 않는 이 무딘 세상에서, 죽음을 서둘러 간단히 봉인하는 폭력 앞에서, 권력이 여전히 인간을 누르고, 인간이 왜 그렇게 죽었어야 하는지 묻지 않고 ‘인간됨’을 이토록 쉽게 내팽개치는 이 모질고 기이한 세상에서 한강은 오늘도 어디선가 걷고 읽고 쓰고 있을 것이다. “침묵을 가장 작고 단단한 사물로 응축”한 흰 조약돌 같은, “찌르는 기쁨”(‘흰’에서)이고 생명인 그녀의 글-짓기. 문학이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