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요리하는 영장류



완독

경향신문

공유하기

닫기

보기 설정

닫기

글자 크기

컬러 모드

컬러 모드

닫기

본문 요약

닫기 인공지능 기술로 자동 요약된 내용입니다.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과 함께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제공 = 경향신문&NAVER MEDIA API)

내 뉴스플리에 저장

닫기

요리하는 영장류

[하리하라의 사이언스 인사이드]요리하는 영장류

코로나19 감염 후, 답답한 자가격리를 끝내고 외출이 가능해졌을 때 가장 먼저 찾은 건 공원이었다. 아직 초봄이라 공기는 차가웠지만, 바깥 바람이 그리웠기 때문이었다. 짧은 산책의 마무리로는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제격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한 모금 머금은 따뜻한 액체에서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색과 제형은 커피가 분명한데, 혀는 커피를 인식하지 못했다. 코로나19의 후유증인 미각 상실의 결과였다.

혀에 존재하는 미각 수용체는 평소에도 2~8주를 주기로 교체되기 때문에, 코로나 바이러스의 침투로 사라진 미각은 두어 달 후에는 다시 이전과 비슷해졌다. 하지만 그 두 달 동안 맛에 대해 매우 새로운 경험을 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미각의 회복 속도가 맛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먼저 회복된 미각은 신맛이었고, 그다음이 짠맛이었으며, 가장 늦게 돌아온 건 단맛이었고, 쓴맛은 들쭉날쭉했다. 약을 혀에서 녹여도 쓴맛이 안 느껴지는데, 상추는 써서 먹을 수 없었다. 미각이 돌아오는 과정에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커피를 즐길 수 없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뜨거운 물과 같은 느낌이었던 아메리카노가 얼마 후엔 시큼한 맛의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변했다. 그때 알았다. 쓰고 뜨거운 물은 먹을 수 있어도, 시고 뜨거운 물은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미각 상실로 인한 또 다른 이상한 경험은 단것에 대한 집착이었다. 눈으로는 설탕과 시럽과 크림의 단맛을 상상할 수 있지만, 막상 혀가 그 맛을 느끼지 못하니 뇌는 충족되지 않은 단맛에 집요해졌다. 단맛의 자극이 심해 입안이 얼얼하게 느껴질 때까지 단것을 먹어본 것은 아주 어린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거나 먹어서는 안 된다. 우리 몸은 먹어야만 하는 것과 피해야 하는 것을 맛을 통해 구분한다. 어린아이들은 단맛과 감칠맛, 그리고 짠맛에 열광한다. 단맛은 세포 내 에너지원인 포도당의 맛이고, 감칠맛은 몸을 만들고 조절하는 아미노산의 맛이며, 짠맛은 체액의 농도를 조절하는 염분의 맛이기 때문이다. 포도당이 부족하면 활력을 잃고, 단백질이 모자라면 몸이 축나며, 나트륨이 부족해지면 생존 그 자체가 위협을 받기에 이런 맛들에 대한 선호는 본능적이다. 반면 쓴맛에 속하는 것들은 진저리를 치며 피하려 한다. 사람이 선호하는 맛을 느끼는 미각 수용체의 종류는 단일하지만, 쓴맛 수용체는 20가지가 넘는다. 쓴맛 수용체들은 주로 식물이 만들어내는 독성 알칼로이드를 감지한다. 독은 피해야 생존에 유리하므로, 쓴맛은 소량으로도 불쾌감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뒷맛도 오래 남아 혐오의 기억을 깊게 각인시킨다.

동물에게 맛을 느끼는 능력은 먹잇감을 결정짓는 것인데, 먹거리가 맛을 규정하기도 한다. 육식동물인 고양이와 하이에나는 사냥감의 단백질과 지방만으로도 열량을 얻는 데 큰 문제가 없다. 그래서 이들은 진화 과정상 단맛을 느끼는 유전자를 잃어 탄수화물 선호도가 낮은 편이다. 반대로 조상 대대로 죽순과 과일에 탐닉했던 판다는 식육목 곰과에 속하는 동물임에도 감칠맛 유전자를 잃어서 이제는 고기에 대한 열망이 사라진 상태다. 이 분야에서 가장 극단적인 동물은 흡혈박쥐로, 이들은 혈액 속 염분에만 집중하다가 단맛과 감칠맛, 심지어 쓴맛을 느끼는 감각도 몽땅 잃고 오로지 짠맛에만 열광한다. 동물들은 이처럼 타고난 맛에 대한 감각에만 집중하여 행동한다. 좋아하는 맛은 탐닉하고, 싫어하는 맛은 피하도록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타고난 맛의 감각도 그대로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음식을 조리하고 가공해 쓴맛을 제거하고 풍미를 증폭한다. 사람에게 맛은 이제 더 이상 본능적 대상이 아니라, 문화와 학습의 산물이 되어 본능적 거부감을 벗어나기도 한다. 원래 상한 음식에서 나던 신맛에 구미가 당기고 알칼로이드의 일종인 카페인의 쓴맛을 갈구하는 것을 보면, 익숙함은 때로 쉽게 본능을 넘어서기도 함을 알 수 있다.

<요리 본능> 저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랭엄은 인간을 ‘불로 요리하는 동물’이라 말하길 주저하지 않는다. 불을 이용해 식재료를 익혀 먹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커다란 뇌를 갖게 돼 생각할 수 있게 됐고, 더 작은 이빨과 유연한 턱을 갖게 돼 말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유인원에서 벗어나 인간이 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생물은 경쟁하고, 인간은 요리한다. 최근 들어 어린아이들도 안다는 요리 예능프로그램의 폭발적 인기는 생물학적 본성과 인간적인 특성을 솜씨 좋게 잘 버무린 데서 온 것일 테다.

이은희 과학저술가

이은희 과학저술가

  • AD
  • AD
  • AD

연재 레터를 구독하시려면 뉴스레터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겠어요?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콘텐츠 서비스(연재, 이슈, 기자 신규 기사 알림 등)를 메일로 추천 및 안내 받을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아니오

레터 구독을 취소하시겠어요?

구독 취소하기
뉴스레터 수신 동의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안녕하세요.

연재 레터 등록을 위해 회원님의 이메일 주소 인증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입니다. 이메일 주소 변경은 마이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보기
이메일 주소는 회원님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합니다.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신 경우, 인증번호가 포함된 메일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뉴스레터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로 인증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 연재 레터 구독이 완료됩니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닫기
닫기
닫기